▶우화성이라는 게 일본 문학 풍토에는 적어요. 그리고 그러한 우화성이 짙은 작품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됩니다. 현재의 것을 모두 재구축하여, 하나의 우화의 세계까지 가져가는 데도 십여 년, 또는 수십 년이 걸리 겁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역시 아직은 그 영역에 도달하지 않은 '발전 도상의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소설이란 너무 감성에 의지하면 출구가 없어져 버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역시 소설이라는 건 입구가 있고 출구가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입구로 들어가면 뭔가 안티테제(antithese)에 부딪혀서, 다른 것이 되어 출구로 나오는 게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문학에는 그러한 면이 좀 적은 것 같습니다. 즉 그것은 일종의 우화지만 말입니다. 그러한 일이 실제로 있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또 그렇게 편리하게 안티테제가 생겨나고, 편리하게 출구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화성'이 강한 작가로 나는 미국의 카포티를 예로 들고 싶습니다. 재능 있고, 따스하고, 더구나 그것을 감추려 하는 사람은 흔치 않아요. 좋은 작품은 그러한 데서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미국 소설을 읽고 느끼는 것은, 미국에는 단락이나 기회가 있다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세계 대전이나 베트남 전쟁을 치르고, 드러그 컬처가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소설을 쓰기 쉬운 상황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히려 평화로운 것이 제일 그려 내기 어렵습니다.
▶챈들러의 방법론으로서, 'seek and Find'라는 테마를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찾아내ZT을 때는 찾아내려 했던 거싱 이미 변지로딘 상태라는 거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미스터리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이며, 이 테마는 나의 작품 세계와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챈들러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챈들러의 소설을 무대로 하여, 도시론이 전개되었고, 그와 나의 도시 소설의 기법은 결국 도시에서 살아가는 인간상이란,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양을 쫓는 모험』은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의 취미 중 하나는 달리기인데, 그 중에서도 '장거리형'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장편과 단편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장편 소설을 써나가고 있을 동안엔 조금씩 내 자신이 변해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단편의 겨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작했을 때의 자신을 마지막까지 끌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단편 소설을 쓸 때에는 하나의 통일된 세계를 제시한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고, 세계를 '잘라 낸다'는 느낌이 들지요. 하지만 아무리 능숙하게 잘라 내도, 결국은 거짓말입니다. 다만 장편 소설에는 꾸밈없고 자연스러운 부분이 많이 생겨나며, 그러한 점이 어색한 것을 메워 주지 않아요. 그래서 단편집을 나중에 다시 읽어보는 건 몹시 괴로운 일입니다.
▶나는 앞으로 소설을 쓰는 젊은이가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도 필요 없고, 누구와 의논을 하거나 통근할 필요도 없다는 점에서 소설가란 이상적인 직업이므로, 소설가를 지망하는 젊은이가 늘어날 것이고, 결과적으로 전혀 새로운 타입의 소설이 주류를 이우게 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지금의 젊은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반대로 그들이야말로 앞으로 좋은 작품을 남길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일본의 순수 문학은 별로 읽지 않고, 미국의 페이퍼백을 읽으며 문장 수업을 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학과와는 달리 고등 학교 때부터 영어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영어로 된 소설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뭔가 다른 페이스로 대화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그 때문에 언어에 대한 감각이 다른 사람과는 약간 달라진 듯합니다.
▶나의 작품에는 '가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내 자신이 가족에 대해 별로 중점을 두지 않으며, 가족뿐만 아니라 단체나 그룹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강한 의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인간 내부에는 이미 청춘이나 폭력 등이 포함되어 있고, 그것은 '공통된 것'이므로, 굳이 직접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나는 내 나름의 조용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작품들이 갖고 있는 '상쾌함'은 그런 데서 기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것을 가장 단적으로 배웠던 것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서였을 것입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영, 미 번역 소설의 문체이며, 보네거트의 문체와 흡사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처음에는 종전의 문체로 써보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우선 영어로 조금써본 후 그것을 번역했더니 훨씬 마음에 들어, 쉽고 수월하게 써 나갈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보네거트뿐만 아니라 브로우티건도 좋아했으며, 나 자신이 그들의 영향을 확실히 받았음을 인정합니다. 내가 챈들러의 소설을 읽고 감탄한 것은, 그 작품이 호소해 오는 리얼리티였습니다. 그는 작가에게 살아가는 데 대한 확고한 자세가 있고, 사물을 파악하는 확실한 시점이 있으면,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허구를 묘사해도 리얼리티는 반드시 스며 나오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문체'를 모방하기는 쉽지만, '시점'을 모방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973년 핀볼』을 쓴 후에, 나는 작가로서 하나의 방향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는 언어적인 스타일의 추구였고, 또 하나는 스토리 텔링-'스토리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나가는'기술 방식-이었습니다. 나는 스토리 텔링 기법을 선택하였는데, 그 결과 『양을 쫓는 모험』이 완성되었습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는 '나'와 '쥐'가 그들의 70년대를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주제이지만,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나'만으로 'seek-and-find-story'를 추구하고, '쥐'에 대해서는 부재로서 병렬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나'와 '쥐'의, '존재'와 '부재'가 표리 관계를 이루며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작품 속의 '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자신도 알지 못하며, 그것이 나 자신도 그 개념을 알지 못한 채 써 나갔지만, '양'의 존재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나는 스토리 텔링의 재미를 이 작품에서 가장 강하게 느꼈습니다.
▶나는 쓰고 싶은 게 없기 때문에 반대로 긴 소설(장편)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쓰고 싶은 게 없으므로, 그만큼 구조가 간단해지니까요.
▶나의 경우, 처음부터 테마를 정해 놓고 쓰는 일은 없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테마 비슷한 게 생겨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쓰는 소설에는 거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작품에는 '죽음'이 곧잘 묘사되고 있는데, 나 자신의 의식은 원칙적으로는 '리얼 타임'입니다. 그러나 '상실된 것에 대한 공감(sympathy)는 매우 강합니다. 또한 나의 내면에는 사물을 '현재 존재하는 것'과 '이전에 존재했지만,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 두 개의 세계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parallel world 같은 것입니다. 절대적인 정황은 아닙니다. 약간의 위상이 다른 곳에, 지금의 정황과 같거나 다른 관계로서, 반대의 정황이 존재하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나의 경우, 상실된 것에 대한 동정은 결코 회고적인 게 아닙니다. 리얼 타임이에요. 부재의 존재감이나 존재의 부재감 같은 감각이죠. 이 parallel world 라는 관점에서 보면,『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는 분명히 이 기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1973년의 핀볼』이나『양을 쫓는 모험』의 경우처럼, 이 소설에서도 '존재'의 이야기와 '부재'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양을 쫓는 모험』같은 이야기를 쓸 때에, 존 어빙의 존재가 힘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현재에 있어서도 쓸 수 있다는 테제에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빙을 읽었기 때문에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어빙의 경우는, 강간과 같은 생생한 현실이 묘사되어 있는데, 나는 그것을 '기호'나 '신호' 같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별로 생생한 소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요. 작가에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까, 기호 같은 게 있으면, 그의 경우....폭력이나 죽음 자체는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나의 소설의 어떤 등장 인물에는 이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리얼리티가 있다고 하는 데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어떤 특징을 나타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그 특징부터 시작합니다. 손가락이 없다든지, 쌍둥이라든지, 핑크빛 원피스를 입고 있다든지....... 그런데 그 특징은, 써 내려가고 있는 동안에 저절로 형성되어 가죠. 그 특징 자체가 '본질'이 되고, 인간이 '속성'처럼 되어 버리는데, 오늘날의 인간도 이와 유사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됩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제목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카포티의 『마지막 문을 닫아라』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리라. 바람에게만 마음을 돌리겠다'는 대목에서 생각해 낸 것인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나는 언젠가 '전국 청소년들의 눈물을 자아낼 만한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역주: 이 인터뷰는 『양을 쫓는 모험』발표 후 크게 호평을 받았을 때의 인터뷰인데, '청소년들의 눈물을 자아낼 작품'이란 바로 『상실의 시대』를 예고한 것이었다).
▶작가가 번역을 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소설적인 시야가 넓어지는 동시에, 자가 중독적으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실의 시대』에는 아무래도 성 묘사가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과는 다른 방식의 신선한 성 묘사가 필요했던 것이죠. 리얼하고 또 청결한 섹스 묘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소설의 경우는 내 방식은 이렇다, 이것이 옳고, 이것이 틀린 것이다. 라는 식으로 밀고 나갈 수 있어요. 무엇을 쓰든 결국은 픽션이니까요. 에세이라는 것은 그 반대여서,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부끄러우니까 말이죠. 소설의 경우는 계속 밀고 나갈 수 있죠....그래서 소설에 있어서는 주인공의 아이덴티티라고 할까, 그러한 것을 나름대로 굳혀 갑니다. 그래서 소설을 쓰고 있는 내 자신이 그 주인공 평에 서서, 이를테면 주인공이 지하로 잠입하면 같은 시점에서 어둠을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무엇이 나타날까, 어떻게 전개될까,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쓰는 겁니다.
▶픽션의 경우, 잇따라 여러 인물이 나오잖아요? 소설을 쓰고 있으면서도 재미있어요. 이러한 사람이 있는가, 하고 스스로도 감탄하곤 해요. 소설가들 중에는 처음부터 프로그램을 가지고 쓰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내 경우는 프로그램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폰터니어티(자발성, 자연스러움)가 생겨나지 않아요. 이를테면 단편 소설 『코끼리의 소멸』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코끼리가 사라진 '코끼리 우리'는 어떤 상태일까 하고 생각하는 데서, 즉 '일종의 풍경'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속에 있던 코끼리를 생각하면 뭔가 쓸 수 있게 되죠.
▶지금이 소설을 쓰기에는 좋은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확고한 체제나 스타일, 문제'등이 없기 때문에, 즉 전국 시대와도 같아서 '힘이 작품을 쓰면, 그것이 내일의 주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번역한 어빙의 『곰을 놓아 주다』와 같은 긴 소설을 번역하고 있으며, 텍스트 속에 잠겨 있는 일종의 '리듬감' 같은 것이 전달되어 옵니다. 따라서 이러한 번역 작업에 의해서, 나의 소설에도 변화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 책을 번역하던 중에 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상당히 긴 장편 소설이 된 것도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러한 변화는 당연한 일이고, 또 그 때문에 나는 즐겨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내 스스로 발견한 좋은 작품이 아니면 나는 번역을 할 수 없습니다. 남이 가져온 것을 변역하기란 매우 어려운데, 그 이유는 텍스트들에는 '흐름'이 있으므로 문장의 호흡을 파악하여 리듬을 타지 않으면, 작업이 잘 진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나 자신과 문장의 '흐름'이 합치되지 않을 경우, 번역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머릿속이 영어로 되어 있는 사람-에 대해, 번역은 '영어적인 생각과 글의 구조를 일본어적인 느낌이나 일본어적인 글의 구조로 옮기는 일'이므로, 사실상 '머리가 일본어적 구조로 되어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즉, 나의 '머리 구조가 선천적으로 일본어적'이므로 번역이 가능하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하루키 문학 수첩-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