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25일 금요일

하루키와 달리기

『육체가 바뀌면 삶도 바뀐다! 』

현재 일본의 최대 베스트 셀러 작가이면서 전세계적으로도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murakami haruki가 마라톤 광이라는 사실은 국내 독자들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졌습니다. 32세에 전업작가를 선언한 직후 달리기를 시작한 이래 50대로 접어든 지금까지 haruki는 16번의 풀코스 마라톤 완주는 물론 100km 울트라마라톤 완주, 그밖에 수많은 달리기 대회에 참가해 왔다고 하는데, 아마추어로서는 베테랑에 준하는 경력의 마라토너인 셈이지요. 최근 발간된 일본의 격주간 잡지 'BRUTUS'(6월 1일자)는 haruki와의 특집 인터뷰를 통해 그가 보는 신체와 정신의 관계, 육체의 윤리성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전업작가를 선언한 32세 이후 부터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의 나는 하루 60개피 이상의 담배를 피워대는 헤비스모커였으나,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담배를 끊었다. 1천장의 소설을 일 년쯤 걸려서 쓰고, 다시 그것을 10번이건 15번이건 처음부터 고쳐 쓰는 것이 나의 소설 작업인데, 그 과정이란 정말 머리 속이 하얗게 느껴질 정도로 힘들고 고된 작업이며 대단한 체력과 인내력이 요구된다. 모처럼 소설가가 되었으니 끝까지 해낼 수밖에 없다고 작정한 그 무렵에 그렇다면 체력과 인내력을 키우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모색했다. 그것이 달리기이다.

지난 16년 동안 나는 1주일에 6일, 하루 평균 1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달려왔다. 일년에 달리기를 쉰 날은 불과 몇일이 안될 것이다. 제법 바쁜 인기작가로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비결은 하루를 아예 23시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날은 달리고 싶지 않은 날도 있다. 그러나 뛰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으로 습관을 들이면 그런 날도 달릴 수 있다. 인생의 고통에 비한다면 하루 10km 달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리고 실은 달리면서 고통이 아닌, 즐거움을 느낀다.정기적으로 운동을 시작하면 그때부터의 체력이 그대로 유지된다. 나의 경우는 33세에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50대로 접어든 지금도 그때의 체력이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순발력은 나이가 먹으면 어쩔 수 없이 떨어지는 것이지만 체력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달리기는 빨리 시작할수록 좋다.

작가의 일이란 집중력과 지구력이란 동전의 양면으로 이루어진다. 가령 4년을 걸려 쓴 작품이 있다고 할 때 그 4년 동안 매일 쓰는 것은 아니고 한 석달을 집중적으로 빼내고(글을) 조금 다른 일 하는 체 하다가 다시 석달을 틀어박힌다. 실은 그 석달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보통 2주이다. 대부분의 모든 것이 그 2주에 정해진다. 그 2주간의 시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 이전의 두달 반이 필요한 것이다. 이때에는 매일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뭐든지 좋으니까 계속 쓴다. 기분이 내키지 않든, 힘들든, 즐겁든 그냥 쓴다. 새벽 4시부터 점심 때까지 계속 쓰다보면 어느날 '들어가고 싶은 바로 그곳(정확히 옮긴다면 haruki는 '가버린다' 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지구력이 뒷받침되어야 집중력이 생기는 것인데, 이것은 장거리 러닝과 매우 흡사하다.

20대나 30대에는 원고 마감이 닥쳐야 밤을 새워 몰아 쓰는 때도 있었으나 40, 50대가 되면 그런 파워는 떨어진다. 마치 홈런 타자의 타구가 어느날 펜스 앞에서 떨어지거나 평범한 외야 플라이가 되는 때가 오는 것이다. 아주 희귀한 천재가 있다면 그렇지도 않겠지만 나는 그런 천재가 아니니 그런 파워를 유지하는 것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만들어놓자고 계획했다. 두달 반 정도 그동안 열심히, 또박또박 하고 있으면 2주간의 중요한 시기가 온다는 시스템인데, 그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힘이 필요하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할 때는 소설가란 그런 일을 하면 정작 글은 쓰지 못할 것이란 충고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거꾸로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자기 안에 있는 불건강한 것이 나온다고 믿는 편이다. 소설은 불건강한 것인가? 틀림없이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독이 없으면 소설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독을 꺼내기 위해서 몸 자체는 건강해야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소설은 자기 안에 숨어있는 짐승을 꾀어내는 작업이다. 그때 체력이 없으면 그 짐승이 소설가 자신을 잡아먹을 것이다. 물론 문학사에는 랭보, 다자이 오사무,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처럼 그 독, 그 짐승과 더불어 일상을 산 이들도 있긴 하지만, 그들의 작업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나는 일찍 죽거나 자살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좋으나 싫으나 장거리 러너일 수밖에 없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치 자신 안의 깊은 곳에 샘이 있어 그 물을 매일 길어와야 하는 작업이다. 매일매일 기어 내려가 물 한 바가지 푸고 다시 올라오는 시지푸스적인 노동을 계속하다보면 앞에서 말했던 마지막 2주간의 중요한 시기, 곧 '들어가야 할 곳'에 이르는 때가 온다. 그때는 기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원하면 이미 몸과 정신이 그곳에 옮겨져 있는 때이다. 그런 초자연적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부지런히 내려갔다가 올라와야 한다. 그것이 조건이다.

나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서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예를 들면 이가 아프면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 육체적인 훈련이 결여된 정신 일변도의 수련이나, 또는 그 반대의 경우이나 모두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지금과 같은 정보 과다의 시대는 정보가 많은 만큼 가치 기준도 다양해서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어렵게 만들고는 한다. 바로 그래서 나는 앞으로는 육체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윤리성을 따르는 것이 중요한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야성의 지적인 복권이라고나 할까. 이때 중요한 것이 몸이 말하는 것에 대해 지성이 얼마나 균형된 감각으로 귀를 기울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난 16년 동안 달리면서, 그리고 16번의 풀 마라톤을 포함한 여러 달리기 대회의 경험을 통해서 나의 몸매, 스타일, 식생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체까지, 많은 것이 바뀌었다. 변하는 몸을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마치 사춘기의 여자애가 거울 앞에 서있는 느낌과 비슷하다. 보기 싫은 군살이 없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일 것이다. 문체로 보자면 무엇보다 호흡이 길어졌다는 점이 달라졌다. 20여년 전, 재즈 카페를 하면서 음악의 리듬에 바탕을 둔 글을 쓸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4비트에서 8비트, 16비트까지 음악적인 리듬이 있는 문체가 나쁘다는 아니다. 다만 음악의 리듬에 토대를 둔 글은 긴 글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다.

최근에는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 경기)를 시작했는데, 그 이전(96년)에 100km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그러나 역시 즐겁고 좋았다. 아침 5시에시작해 저녁 때까지 달리다보면(기록은 11시간 42분) 어느 지점부터 자연스럽게 사고가 달라진다. 가령 60km 지점까지는 평소의 페이스로 담담하게 달릴 수 있었는데, 그 이후부터는 사고가 바뀌어져야만 달릴 수 있었다. 사고를 바꾸고 싶어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뀌어진다. 이때부터는 더 이상 다리 힘만으로는 달릴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때부터 온몸의 다른 부속품들이 다리를 커버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마치 힘을 내라, 우리가 대신해주겠다, 라고 다른 부속품들이 다리에게 외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달리다보니 이렇게 좋은 느낌도 있구나 하는 그런 경험이었다. 그때를 넘어 85km를 지나면서는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지고, 다 지나갔구나, 넘어왔구나 하는 느낌 뿐이었다. 골인했을 때의 느낌은 정말 반가운 것이었다. 설명할 수 없지만 이 경험이 반드시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설명하면 차라리 가벼워질 것 같은 묵직한 감동이었다.

가끔 달리기 예찬을 할 때면, "신체장애가 있고 스포츠를 못하는 사람도 좀 생각하라"는 지적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거꾸로 건강한 몸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무신경하게 함부로 다루고 있는 사람이 보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해(98년) 6월 나는 호노룰루에서 열린 맹인마라톤 15km 코스에 반주자로 나가 눈이 보이지 않는 러너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달릴 기회가 있었다. 하나의 끈이 서로 다른 조건의 두 주자를 하나로 연결해 주고 있었다. 행복한 경험이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장애가 신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체를 진정으로 의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람의노래를들어라 중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구. 조건은 모두 같은 거야. 고장난 비행기에 함께 탄 것처럼 말이야. 물론 운이 좋은 녀석도 있고, 운이 나쁜 녀석도 있겠지. 터프한 녀석이 있는가 하면 나약한 녀석도 있을 테고, 부자도 있고 가난뱅이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남들보다 강한 힘을 가진 녀석은 아무데도 없다구. 모두가 같은 거야.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자는 언젠가는 그것을 잃게 되지 않을까 겁을 집어먹고 있으며, 아무것도 갖지 못한 녀석은 영원히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지. 모두가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빨리 그걸 깨달은 사람은 아주 조금이라도 강해 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라구. 시늉을 하는 것만으로도 좋아. 안그렇나? 강한 인간이란 어디에도 없다구. 강한 척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뿐이야."

-후기-
'데레크 하트필드'라는 작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소설따위는 쓰지 않았을 거라고까지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내가 나아간 길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길이었을 거라는 건 확실하다. 고등학생 때, 고베의 고서점에서 외국 선원이 놓고 간 듯한 하트필드의 페이퍼백을 몇 권 한꺼번에 산 적이 있다. 한 권에 50엔이었다. 만일 그 곳이 책방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책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낡은 물건이었다. 화려한 표지는 거의 떨어져 나갔고, 종이는 오렌지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아마도 화물선이나 구축함의 하급 선원의 침대 위에 얹혀진 채 태평양을 건너고 그리고 까마득히 먼 시간의 저편에서 내 책상 위로 왔을 것이다.

몇 년인가 후에 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오로지 하트필드의 무덤을 방문하기 위한 짧은 여행이었다. 무덤이 있는 곳은 열렬한(그리고 유일한) 하트필드 연구가인 토머스 맥클루어 씨가 편지로 가르쳐 주었다. 그는 편지에 "하이힐의 뒤축만큼이나 조그만 무덤입니다. 못 보고 지나치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썼다. 뉴욕에서 거대한 관 같은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오하이오주의 그 작은 마을에 도착한 건 아침 일곱 시였다. 나말고 그 마을에서 내린 승객은 한 사람도 없었다. 마을보다도 넓은 묘지였다. 내 머리 위에서는 종달새 몇 마리가 빙글빙글 원을 그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트필드의 무덤을 찾는 데는 꼭 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주위의 초원에서 꺾은 먼지투성이의 들장미를 바치고 나서 무덤을 향해 합장하고 그 곳에 주저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5월의 부드러운 햇살 아래에서는 삶도 죽음과 마찬가지로 편안하게 느껴졌다. 나는 드러누워서 눈을 감고 몇 시간 동안 종달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다. 이 소설은 그런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디에 도달했는지 나도 모른다. "우주의 복잡함에 비하면 우리의 세계따위는 지렁이의 뇌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트필드는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나도 바라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트필드의 기사에 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맥클루어 씨의 역작, <불임의 별들의 전설>(1968)에서 몇 군데 인용했을 밝힌다. 감사드린다.

-1975년 5월 murakami haruki-

나의작품을말한다-하루키

▶우화성이라는 게 일본 문학 풍토에는 적어요. 그리고 그러한 우화성이 짙은 작품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됩니다. 현재의 것을 모두 재구축하여, 하나의 우화의 세계까지 가져가는 데도 십여 년, 또는 수십 년이 걸리 겁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역시 아직은 그 영역에 도달하지 않은 '발전 도상의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소설이란 너무 감성에 의지하면 출구가 없어져 버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역시 소설이라는 건 입구가 있고 출구가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입구로 들어가면 뭔가 안티테제(antithese)에 부딪혀서, 다른 것이 되어 출구로 나오는 게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문학에는 그러한 면이 좀 적은 것 같습니다. 즉 그것은 일종의 우화지만 말입니다. 그러한 일이 실제로 있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또 그렇게 편리하게 안티테제가 생겨나고, 편리하게 출구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화성'이 강한 작가로 나는 미국의 카포티를 예로 들고 싶습니다. 재능 있고, 따스하고, 더구나 그것을 감추려 하는 사람은 흔치 않아요. 좋은 작품은 그러한 데서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미국 소설을 읽고 느끼는 것은, 미국에는 단락이나 기회가 있다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세계 대전이나 베트남 전쟁을 치르고, 드러그 컬처가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소설을 쓰기 쉬운 상황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히려 평화로운 것이 제일 그려 내기 어렵습니다.

▶챈들러의 방법론으로서, 'seek and Find'라는 테마를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찾아내ZT을 때는 찾아내려 했던 거싱 이미 변지로딘 상태라는 거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미스터리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이며, 이 테마는 나의 작품 세계와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챈들러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챈들러의 소설을 무대로 하여, 도시론이 전개되었고, 그와 나의 도시 소설의 기법은 결국 도시에서 살아가는 인간상이란,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양을 쫓는 모험』은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의 취미 중 하나는 달리기인데, 그 중에서도 '장거리형'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장편과 단편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장편 소설을 써나가고 있을 동안엔 조금씩 내 자신이 변해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단편의 겨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작했을 때의 자신을 마지막까지 끌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단편 소설을 쓸 때에는 하나의 통일된 세계를 제시한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고, 세계를 '잘라 낸다'는 느낌이 들지요. 하지만 아무리 능숙하게 잘라 내도, 결국은 거짓말입니다. 다만 장편 소설에는 꾸밈없고 자연스러운 부분이 많이 생겨나며, 그러한 점이 어색한 것을 메워 주지 않아요. 그래서 단편집을 나중에 다시 읽어보는 건 몹시 괴로운 일입니다.

▶나는 앞으로 소설을 쓰는 젊은이가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도 필요 없고, 누구와 의논을 하거나 통근할 필요도 없다는 점에서 소설가란 이상적인 직업이므로, 소설가를 지망하는 젊은이가 늘어날 것이고, 결과적으로 전혀 새로운 타입의 소설이 주류를 이우게 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지금의 젊은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반대로 그들이야말로 앞으로 좋은 작품을 남길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일본의 순수 문학은 별로 읽지 않고, 미국의 페이퍼백을 읽으며 문장 수업을 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학과와는 달리 고등 학교 때부터 영어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영어로 된 소설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뭔가 다른 페이스로 대화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그 때문에 언어에 대한 감각이 다른 사람과는 약간 달라진 듯합니다.

▶나의 작품에는 '가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내 자신이 가족에 대해 별로 중점을 두지 않으며, 가족뿐만 아니라 단체나 그룹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강한 의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인간 내부에는 이미 청춘이나 폭력 등이 포함되어 있고, 그것은 '공통된 것'이므로, 굳이 직접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나는 내 나름의 조용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작품들이 갖고 있는 '상쾌함'은 그런 데서 기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것을 가장 단적으로 배웠던 것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서였을 것입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영, 미 번역 소설의 문체이며, 보네거트의 문체와 흡사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처음에는 종전의 문체로 써보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우선 영어로 조금써본 후 그것을 번역했더니 훨씬 마음에 들어, 쉽고 수월하게 써 나갈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보네거트뿐만 아니라 브로우티건도 좋아했으며, 나 자신이 그들의 영향을 확실히 받았음을 인정합니다. 내가 챈들러의 소설을 읽고 감탄한 것은, 그 작품이 호소해 오는 리얼리티였습니다. 그는 작가에게 살아가는 데 대한 확고한 자세가 있고, 사물을 파악하는 확실한 시점이 있으면,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허구를 묘사해도 리얼리티는 반드시 스며 나오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문체'를 모방하기는 쉽지만, '시점'을 모방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973년 핀볼』을 쓴 후에, 나는 작가로서 하나의 방향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는 언어적인 스타일의 추구였고, 또 하나는 스토리 텔링-'스토리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나가는'기술 방식-이었습니다. 나는 스토리 텔링 기법을 선택하였는데, 그 결과 『양을 쫓는 모험』이 완성되었습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는 '나'와 '쥐'가 그들의 70년대를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주제이지만,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나'만으로 'seek-and-find-story'를 추구하고, '쥐'에 대해서는 부재로서 병렬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나'와 '쥐'의, '존재'와 '부재'가 표리 관계를 이루며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작품 속의 '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자신도 알지 못하며, 그것이 나 자신도 그 개념을 알지 못한 채 써 나갔지만, '양'의 존재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나는 스토리 텔링의 재미를 이 작품에서 가장 강하게 느꼈습니다.

▶나는 쓰고 싶은 게 없기 때문에 반대로 긴 소설(장편)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쓰고 싶은 게 없으므로, 그만큼 구조가 간단해지니까요.

▶나의 경우, 처음부터 테마를 정해 놓고 쓰는 일은 없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테마 비슷한 게 생겨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쓰는 소설에는 거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작품에는 '죽음'이 곧잘 묘사되고 있는데, 나 자신의 의식은 원칙적으로는 '리얼 타임'입니다. 그러나 '상실된 것에 대한 공감(sympathy)는 매우 강합니다. 또한 나의 내면에는 사물을 '현재 존재하는 것'과 '이전에 존재했지만,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 두 개의 세계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parallel world 같은 것입니다. 절대적인 정황은 아닙니다. 약간의 위상이 다른 곳에, 지금의 정황과 같거나 다른 관계로서, 반대의 정황이 존재하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나의 경우, 상실된 것에 대한 동정은 결코 회고적인 게 아닙니다. 리얼 타임이에요. 부재의 존재감이나 존재의 부재감 같은 감각이죠. 이 parallel world 라는 관점에서 보면,『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는 분명히 이 기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1973년의 핀볼』이나『양을 쫓는 모험』의 경우처럼, 이 소설에서도 '존재'의 이야기와 '부재'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양을 쫓는 모험』같은 이야기를 쓸 때에, 존 어빙의 존재가 힘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현재에 있어서도 쓸 수 있다는 테제에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빙을 읽었기 때문에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어빙의 경우는, 강간과 같은 생생한 현실이 묘사되어 있는데, 나는 그것을 '기호'나 '신호' 같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별로 생생한 소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요. 작가에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까, 기호 같은 게 있으면, 그의 경우....폭력이나 죽음 자체는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나의 소설의 어떤 등장 인물에는 이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리얼리티가 있다고 하는 데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어떤 특징을 나타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그 특징부터 시작합니다. 손가락이 없다든지, 쌍둥이라든지, 핑크빛 원피스를 입고 있다든지....... 그런데 그 특징은, 써 내려가고 있는 동안에 저절로 형성되어 가죠. 그 특징 자체가 '본질'이 되고, 인간이 '속성'처럼 되어 버리는데, 오늘날의 인간도 이와 유사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됩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제목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카포티의 『마지막 문을 닫아라』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리라. 바람에게만 마음을 돌리겠다'는 대목에서 생각해 낸 것인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나는 언젠가 '전국 청소년들의 눈물을 자아낼 만한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역주: 이 인터뷰는 『양을 쫓는 모험』발표 후 크게 호평을 받았을 때의 인터뷰인데, '청소년들의 눈물을 자아낼 작품'이란 바로 『상실의 시대』를 예고한 것이었다).

▶작가가 번역을 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소설적인 시야가 넓어지는 동시에, 자가 중독적으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실의 시대』에는 아무래도 성 묘사가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과는 다른 방식의 신선한 성 묘사가 필요했던 것이죠. 리얼하고 또 청결한 섹스 묘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소설의 경우는 내 방식은 이렇다, 이것이 옳고, 이것이 틀린 것이다. 라는 식으로 밀고 나갈 수 있어요. 무엇을 쓰든 결국은 픽션이니까요. 에세이라는 것은 그 반대여서,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부끄러우니까 말이죠. 소설의 경우는 계속 밀고 나갈 수 있죠....그래서 소설에 있어서는 주인공의 아이덴티티라고 할까, 그러한 것을 나름대로 굳혀 갑니다. 그래서 소설을 쓰고 있는 내 자신이 그 주인공 평에 서서, 이를테면 주인공이 지하로 잠입하면 같은 시점에서 어둠을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무엇이 나타날까, 어떻게 전개될까,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쓰는 겁니다.

▶픽션의 경우, 잇따라 여러 인물이 나오잖아요? 소설을 쓰고 있으면서도 재미있어요. 이러한 사람이 있는가, 하고 스스로도 감탄하곤 해요. 소설가들 중에는 처음부터 프로그램을 가지고 쓰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내 경우는 프로그램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폰터니어티(자발성, 자연스러움)가 생겨나지 않아요. 이를테면 단편 소설 『코끼리의 소멸』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코끼리가 사라진 '코끼리 우리'는 어떤 상태일까 하고 생각하는 데서, 즉 '일종의 풍경'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속에 있던 코끼리를 생각하면 뭔가 쓸 수 있게 되죠.

▶지금이 소설을 쓰기에는 좋은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확고한 체제나 스타일, 문제'등이 없기 때문에, 즉 전국 시대와도 같아서 '힘이 작품을 쓰면, 그것이 내일의 주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번역한 어빙의 『곰을 놓아 주다』와 같은 긴 소설을 번역하고 있으며, 텍스트 속에 잠겨 있는 일종의 '리듬감' 같은 것이 전달되어 옵니다. 따라서 이러한 번역 작업에 의해서, 나의 소설에도 변화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 책을 번역하던 중에 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상당히 긴 장편 소설이 된 것도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러한 변화는 당연한 일이고, 또 그 때문에 나는 즐겨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내 스스로 발견한 좋은 작품이 아니면 나는 번역을 할 수 없습니다. 남이 가져온 것을 변역하기란 매우 어려운데, 그 이유는 텍스트들에는 '흐름'이 있으므로 문장의 호흡을 파악하여 리듬을 타지 않으면, 작업이 잘 진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나 자신과 문장의 '흐름'이 합치되지 않을 경우, 번역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머릿속이 영어로 되어 있는 사람-에 대해, 번역은 '영어적인 생각과 글의 구조를 일본어적인 느낌이나 일본어적인 글의 구조로 옮기는 일'이므로, 사실상 '머리가 일본어적 구조로 되어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즉, 나의 '머리 구조가 선천적으로 일본어적'이므로 번역이 가능하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하루키 문학 수첩-

레이먼드 챈들러와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끼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영역된 뒤 <뉴욕 타임즈 북리뷰> 92년 9월27일자에 실린 미국의 젊은 소설가 제이 매키너니와의 문학 대담에서 레이먼드 챈들러 (Raymond Chandler)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했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60년대 나의 우상이었다. 나는 <오랜 이별, The Long Good-bye>을 12번 읽었다. 나는 그 소설의 주인공들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꾸려가는 방식에 크게 감명받았다. 그들은 고독하지만, 근사한 삶을 찾고 있었다.'

문학사상사에서 펴낸 <하루끼 문학수첩>에서도 하루키가 영향을 받은 11인의 미국 현대작가에서도 챈들러는 제일 먼저 언급 되고 있다.



" .... 특히 그는 소설 기법에 있어서 다분히 챈들러(역주:미국의 추리 소설가, 하드보일드파의 거장)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루끼: ....내가 챈들러를 무척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말로우-작품 속의 주인공-라는 존재 자체가, 존재감이 있는 가설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쓸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챈들러 자신의 자질문제라고도 생각하지만, 그것을 잘 표현해 내지 못하면, 도시라고 하는 것은 그릴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가설이라는 뿌리를 빼버리면, 굉장히 피상적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가와모토: 챈들러는 도시 속에서 황야를 본다고 할까, 도시를 도시로서 보고 있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평소에 살고 있으면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도시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쓰는 것이지요.

- 가와모토 사부로, <도시의 풍경학> 중에서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끼의 두 번째 장편 소설, <양을 쫓는 모험>의 작품구성은 분명히 챈들러적이다. ......차츰차츰 의뢰주가 수상해지고, 의뢰 받은 일 자체도 수상해지면서, 소설의 구성 그 자체에 영향을 줄 정도로 스릴 넘치는 변화가 일어나다. 하루끼 자신은 이 변화를 'seek and find'라는 말을 사용하며, 가와모토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이때 쓰여진 'seek and find'라는 말은, 후에 마치 무라카미 하루끼 문학의 대명사처럼, 연구자나 팬들 사이에서 쓰여지게 되었다).

'find'했을 때는 'seek'했던 것이 이미 변질되어 있다는 것이 테마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은 옳다고 할 수 있다. .... 모든 문학은 발견'find'했을 때에는, 찾고 있던(seek) 것이 당연히 변질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이 점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그것에서 또 다른 테마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찾아 내야 할 것이 미리 상실되어 있는, '부재'라고 하는 테마이다. 'seek and find'에서 테마가 찾아야 하는 것의 부재로-상실로-이행할 때, 무라카미 문학은 챈들러와 뚜렷이 결별하고, 일본으로, 자신의 원래의 체험에 입각한 표현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 래이먼드 챈들러 작가 소개

다음에 나오는 내용들은 여러 책에서(주로 <안녕, 내사랑>과 <오랜 이별>의 작가 소개에서) 나온 레이먼드 챈들러에 관한 내용을 대충 종합해본 것이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미국의 대쉴 해미트가 창시한 하드 보일드 추리소설을 추리소설의 새로운 형태로 확고하게 정착시킨 작가이다. 미스터리의 2대 요소가 '범죄'와 '추리'라면 포에서 코난 도일에 이르는 이전의 본격 추리소설은 탐정의 추리가 중심이었다. 추리소설이란 그야말로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었고, 셜록 홈즈나 에르큘 포와로, 엘러리 퀸 같은 위대한 탐정들은 뛰어난 두뇌로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탐정이었다. 그러나 하드 보일드 소설에서는 탐정이 가만히 앉아서 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나가서 뛰어 돌아다닌다. 논리와 분석이 아니라 주먹과 권총, 그리고 완력과 배짱으로 범인들과 맞서는 것이다. 그러한 탐정의 생활을 묘사하자면 자연히 비정한 폭력이 곳곳에 난무하게 된다.

챈들러는 '간단한 살인 예술(The Simple Art of Murder)이라는 에세이에서 "종래의 추리소설은 사실성이 영점"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엄정한 논리로는 생생한 분위기를 묘사할 수 없고 탐정의 인간적 풍모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전통적 추리소설의 대가들이 살인을 마치 수수께끼 풀이 놀음이나 논리 문제 풀이처럼 다룬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신은 사실적인 세계를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는 형태의 '행동의 문학'을 추구하였다.

챈들러는 자아의식과 자부심이 대단하여 남들과 잘 어울리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대쉴 해미트만 유일한 대작가일 뿐 추리소설 황금기의 작가인 크리스티, 밀른, 벤트리에서 반 다인, 엘러리 퀸에 이르기 까지 모조리 형편없는 작가라고 공언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필립 말로우(Philip Marlowe)는 자연히 이전의 탐정들과 사뭇 다르다. 필립 마로우는 원래 로스엔젤리스 검사국 수사관이었으나, 너무 정직하기 때문에 해고되어 탐정 개업을 한 말로우는 하루 25달러 이상의 보수를 받지 않으며, 직정적이고 완고한 반면 때로는 감상적인 일면을 보이기도 한다. 그는 뛰어난 두뇌로 논리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기 보다는 박력있는 행동으로 악당들과 맞선다.

그러다가 반쯤 죽을 지경이 되기도 하지만 또 다시 일어나 사건에 뛰어든다. 그의 행동이나 말투는 비정하면서도 간결하고 박진감이 있어 통쾌하기 그지 없다. 분석적 천재가 아닌,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그의 모습이 무엇보다도 사실적으로 마음에 와닿는다.

챈들러는 시카고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부모가 이혼을 하는 바람에 양육권을 가진 어머니를 따라 영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교육받았다. 그 자신은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자연히 문학 쪽으로 기울어진 그는 19살 때부터 신문과 잡지 등에 시나 수필, 비평문 따위를 투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입신의 문이 쉽게 열리지 않자 미국으로 돌아온 챈들러는 여러 곳에서 사무원 생활을 하다가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도로 영국으로 건너가 항공대에 입대했다.

1919년에 제대하여 다시 미국으로 온 챈들러는 은행이나 석유회사 등에서 근무하다가 1929년의 경제공황이 닥치자 그만두고는 블랙마스크 같은 싸구려 잡지에 중편 <협박자는 쏘지 않는다>를 투고했다. 편집자는 이 작품이 몹시 마음에 들어 1천 8백 달러의 원고료를 지불하여 계속 작품을 쓰도록 권고했고, 이에 힘을 얻은 챈들러는 본격적인 작가 생활에 들어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1939년 출간한 첫 장편소설 <거대한 잠, Big Sleep>이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고 이어서 나온 <안녕 내사랑, Farewell, My Lovely, 1940>, <높은 창, The High Window, 1942>, <호수 속의 여인, The Lady in the Lake, 1943>등도 모두 좋은 반응을 얻게 된다. 이는 대부분 영화로도 제작 된 것을 보면 가히 챈들러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아카데미 후보로 지명된 <이중보상, Double Indemnity>와 <푸른 달리아, The Blue Dahlia>등의 각본도 그의 작품이다. 챈들러는 1924년 시시 파스칼과 결혼을 했었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36살 때 18살이나 연상인 팰 세실리 보웬과 결혼했다.



두 번이나 이혼 경력이 있는 그녀는 몹시 아름다웠는데, 결혼 생활은 행복한 편이었고, 그녀가 84살에 세상을 떠나자 64살의 챈들러는 몹시 비통해서 자살을 자주 입에 올렸다. 미국추리자가협회 회장을 지냈던 그는 말년에 극심한 우울증과 쇠약증에 시달리다 1958년 마지막 장편 <플레이 백>을 발표한 이듬해인 1959년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 <챈들러 방식>

꽤 오래 전에 어떤 책에서인가 레이몬드 챈들러의소설을 쓰는 비결에 관한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때는 정확하게 내용을 외우고 있었는데, 무척 오래된 일이라서 대부분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매우 재미있는 내용이었던 것 같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들지만 출처가 어디였는
지 영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런 일이 종종 있다. 좋았다는 기억은 있는데 어떻게 좋았는지 잘 생각이 안 나는 것이다.

헌데 그 문장 중에서 딱 한가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하긴 이것 또한 내가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일 뿐 세세한 부분의 맞고 틀림까지는 자신이 없다. 만약 틀리다면 미안합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기억하고,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내가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 기억 또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것으로서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찌되었건 나는 그것을 챈들러-방식이라 부르고 있다.

우선 책상을 확실하게 정해 놓을 것, 이라고 챈들러는 말한다. 자기가 문장을 쓰기에 적당한 책상을 하나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원고용지라던가(미국에는 원고용지가 없지만 아무튼 그와 비슷한 것) 만년필이라던가 자료 같은것을 준비한다. 깨끗이 정돈해 놓을 필요는 없지만 언제든지 일을 할 수 있는 태세는 갖추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매일 어느 시간을 -예를들어 두 시간이면 두 시간을- 그 책상 앞에 앉아서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두 시간에 막힘없이 문장이 써지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처럼 잘 풀리지는 않는, 전혀 아무것도 쓸 수 없는 날도 있는 것이다. 쓰고 싶은데 아무리해도 잘 써지지 않아 짜증나 내팽개쳐 버리는 일도 있고, 처음부터 문장 따윈 전혀 쓰고싶지 않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또는 오늘은 아무것도 쓰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은 직감이 들 때도 있다. (매우 드문 일이지만,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옳은가? 비록 한 줄도 쓸 수 없다고 해도 아무튼 그 책상 앞에 앉아 있을 것, 이라고 챈들러-는 말한다. 그저 책상 앞에두 시간 움직이지 말고 앉아있으라고. 그러는 동안 펜을 들고 어떻게든 문장을 써 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멀건히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 대신 다른 짓을 해서는 안된다. 책을 읽거나 잡지를 들추거나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고양이하고 논다거나 누구랑 이야기를 나누거나 해서는 안된다. 쓰고 싶어지면 쓴다는 태세로 오직 묵묵히 앉아 있지 않으면 안된다. 비록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쓰고있을 때처럼 집중하는 태도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그 순간엔 한줄도 쓰지 못해도 틀림없이 언젠가는 다시 문장을 쓸 수 있는 사이클이 돌아온다, 조바심하면서 쓸데없는 짓을 한들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이다, 라는 것이 챈들러의 방식이었다.

나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비교적 좋아한다. 자세로서 건전하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물론 개인적인 기호의 문제라고 생각되나, 어네스트 헤밍웨이 처럼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해외로 튀어나간다던가 아프리카의 산에 오른다던가 카리브해에서 청다랑어를 낚는다던가 해서 그것을 소설의 소재를 삼는 그런 식은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런 것은 TV의 '무슨무슨 스페셜'과 근본적으로 발상이 같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다. 그런 식으로 글을 쓰고 있으면 점점 에스컬레이트되여 부자연스럽게 소재를 구하려 들게 될 것이다.

그와 비교하면 '그대로 두 시간 책상 앞에서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러는 동안에 어떻게든 될 것이니까' 라는 것은 사상으로서 올바르다. 돈도 들지 않고 남에게 폐도 끼치지 않으며 번거롭지도 않다. 무엇보다도 외적인 요인에 의지하지 않는다는게 떳떳하고 좋다.

나는 원래가 멍하니 있는걸 좋아해서 소설을 쓸 때는 대개 이 챈들러-방식을 취하고 있다. 여하튼 매일 책상 앞에 앉는다. 쓸 수 있건 없건 그 앞에 두 시간 멍하니 앉아 있다. 멍하니 있는 것은 간단하다고 하면 간단하나, 어렵다고 하면 제법 어렵다. 확실히 어떤 술책이나 요령이 필요하다.



'하품교습'은 아니지만, 나의 멀건히 있는 법을 대충 적어 놓는다. 우선 양손으로 턱을 받친다. 양쪽 엄지손가락으로 턱 뼈를 누르고 새끼손가락으로 눈 끝을 누른다. 그리고 목의 힘을 뺀 뒤 양쪽 눈의 초점을 미묘하게 떼어놓는다. 내 경우 다행이도 오른 쪽 시력이 0.08 왼쪽 시력이 0.5이므로 노력하지 않고도 목의 힘을 빼고나면 초점은 자연히 떨어져서 시야가 뿌예지고 만다.

때때로 생각난듯 조금씩 자세를 바꾸면서 대충 이런 자세로 시간을 보낸다. 내 책상 앞에는 창이 있고, 창 너머에는 천평 정도의 빈터가 있다. 병원 용지로서 확보되어 있는 것인데 건축허가가 나지않아 그대로 내버려둔 넓은 토지다. 그 곳에서는 억새풀과 키다리들국화가 치열한 경쟁을 벌
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대개 멍청한 시선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풀이라던가 키다리들국화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줄곧 그렇게 하고 있으면 어느덧 머리속이 팬케익의 재료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한 착각이 엄습한다. 골고루 섞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저기 멍글멍글한 덩어리가 있는 팬케익 재료다. 머리를 뒤로 젖히면 주루루 하는 느낌으로 그 멍글멍글이 있는 골이 뒤편으로 이동하고 앞으로 숙이면 같은 식으로 주르르 앞쪽으로 이동한다. 재미나서 그것을 몇번이고 해 본다.

창 밖에서는 키다리들국화와 억새풀이 계속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개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비행기가 날아간다. 지금은 1983년 봄이고 나는 34세이다. 나는 책상 앞에 언제까지나 멍하니 있다. 진정 얼마 안 있어 뭔가를 쓸 수 있게 되려나 생각해 본다. 지금은 아무것도 쓰고싶지 않
은 것이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 <하루키의 여행법> 중 필립 마로우가 등장하는 '구보 우동집 순례기'

이 식당도 제면소가 직접 경영하는 우동집이지만, 다카마츠 시내에 있어서 다른 우동집에 비하면 우선 우동집으로서의 체제는 제대로 갖추고 있다. 밖에서 볼 때도 제대로 갖춘 우동집의 모습이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는 아침 아홉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는데, 식당 안은 이미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우동을 먹는 사람이 많아서 마리가와 현의 우동집은 아침 일찍 문을 연다. 이 집의 우동 국물은 건해삼의 맛이 짙게 배어나 상당히 맛이 있었다. 주인한테 얘기를 들어 보니 건해삼의 우동 국물은 해삼을 꺼내는 타이밍이 상당히 어렵다고 한다. 여기서는 우동과 간장 우동이 반반씩 팔리고 있다고 한다.



손님들은 모두 대단히 효율적으로 우동을 먹고 있었다. 대개 남자 한 사람이 들어와서 간략하게 주문을 하고, 적당히 고로케나 유부 초밥을 카운터에서 가져다가 익숙한 솜씨로 양념을 쳐서 말없이 후루룩 후루룩 들여 마시고, 다 먹고 나면 돈을 놓고 휙 나가 버린다.

굉장히 거칠다. 필립 마로우도 마리가와 현에서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이런 식으로 우동을 먹었을 것이다. 강하지 않으면 우동을 먹지 못한다. 친절하지 않으면 우동을 먹을 자격이 없다. 운운하면서 말이다.

이 곳은 보통이 120엔, 곱배기가 190엔, 그리고 특대가 260엔이었다.

좋은단편을쓰기위한 8가지팁

좋은단편을 쓰기위한 8가지팁 -커트보네거트

1. 남이 내 글을 읽게 하는 것은 남의 시간을 가져다 쓰는 셈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내 글을 읽고 시간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해야 한다. Use the time of a total stranger in such a way that he or she will not feel the time was wasted.

2. 독자로 하여금 최소한 캐릭터들 중 한명은 나와 연관이 있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Give the reader at least one character he or she can root for.

3. 모든 캐릭터는 무엇이든 욕구를 갖고 있어야 한다. 심지어 물 한잔이라도 말이다.Every character should want something, even if it is only a glass of water.

4. 모든 문장은 다음 두가지 중 하나를 해야 한다. 캐릭터의 어떤 면을 드러내는 것이든, 사건의 진행을 발전시키는 것이든. Every sentence must do one of two things -- reveal character or advance the action.*

5. 시작부분은 당장이라도 끝날 것처럼 써라.Start as close to the end as possible.


6. 새디스트가 되어라. 당신의 주인공들이 아무리 사랑스럽다 하더라도 온갖 가혹한 일들이 그들에게 벌어지게 해야 한다. 독자들이 대체 그 주인공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도록 말이다. Be a sadist. No matter how sweet and innocent your leading characters, make awful things happen to them -- in order that the reader may see what they are made of.


7. 단 한 사람을 위해서 쓰듯 써라. 만약 당신이 창을 열고 온 세상을 향해 사랑을 보내기 시작하면, 당신의 스토리는 폐렴에 걸려 버린다.Write to please just one person. If you open a window and make love to the world, so to speak, your story will get pneumonia.


8. 최대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독자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줘라. 서스펜스 따위는 내다 버려도 좋다. 독자들은 혹시 만약 바퀴벌레들이 마지막 몇 페이지를 갉아먹어 버렸다고 하더라도 그들 스스로 그 이야기의 결말을 맺을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이해를 해야 한다. Give your readers as much information as possible as soon as possible. To heck with suspense. Readers should have such complete understanding of what is going on, where and why, that they could finish the story themselves, should cockroaches eat the last few pages.

거기누구요?

여기에 있는건 나입니다.
거기에 있는것은 당신이겠지만..
당신에게 나는 또 하나의 당신이겠지요
그리고 당신은 다시 나이겠지요
그러므로 나는당신이고 당신은 다시나입니다.
도대체우린 어떤 관계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