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언어로이야기하라. 세계를 인식하는 다른방식.
리얼리즘? 실제있는것을 쓴다.....과연그럴수있는가. 리얼리즘소설이라는것이 과연 가능한가말이다.
실제하는 현실을 우리들이 사용하는언어와 사고방식이 정말 그대로 드러낼수있을까.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걸까.
난 이해가 가지않는다. 동조할수없는것이다. 그리고 동조할수없다면 난 절대 그렇게는할수없다.
기억을 제조합하는것이고 아직 경험하지않은 것들을 살려내 그것을 임의적인 어던형태로 재조합하는것이다. 단 거기 재조합의 의도로 스이는 원료는 바로 자신의 관점이다.
바람이 분다. 그가 눈을 감으면 그곳에서 언제나 바람이분다. 아주 기분좋은 바람이다.
드러난 살갗을 시원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k는 그느낌이 가만히 마음을기울여본다.
그것에서
2007년 6월 2일 토요일
피아니스트
그끝은 어디인가.
글을 써서 어디에 도달할것인가. 하는문제는...
아마 어디에도 도달할수는없다..라는것이 답이아닐가.
어디에 도달하는게 아니다.
어디에 도달할수없는것이다. 본질적으로 ...
이야기의 힘은 강하다.
이야기의힘은어떤 정치적인 힘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한힘을가지고있다.
그걸 사용하는것이다. 마음씀씀이....글을쓰는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것인가가아니라.
지금 무엇을 쓰고잇는가하는문제이다.
음악을 한번들이 감정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아니라. 그음악을 완전히 흡수하는것.
모든것은이미나를 변화시킨다.
이미 존건은 성숙되어있다.
이미 모든것은 갖추어져있다.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려하지말라
앞이라는것은존재하지않으니
앞으로 나아가려는생각때문에 모든세계가 생겨난다.
앞으로나아가려는 의도 욕망 다른것. 이것이 아닌것. 다른곳, 다른사람...그런것은 결국은 존재하지않는개념일뿐이다.
아무리 다라가봐야 그것을 잡을수없다.
개경주처럼. 그것은 먼저달리도록 프로그래밍화되어잇는것이다.
그 고깃덩어리를 잡을수있다는 생각을 버리면
그것을가질수있다는생각을 버리면
나는 비로소 그곳으로들어갈수있다.
나는 비로소 그안으로 들어가 거기에 머물수있다.
다시는돌아오지않는다.
이미지나간자....어디에도 존재하지않는자....
글은 그것의 도구이다.
이야기의 힘은 그흔적이다.
그순간을 잡을수없기에 나는그저 글을 어떤 도구로서 사용하고싶은것이다.
그것이 맞는것이다.
올바른길이다. 글을통해 무엇을 해야한다,혹은 무언가를 이루어야한다라는생각을 내려놓는다.
그런데 정말 그것은 어떤것일까.
내려놓는다라는것은 어던것일까
무게를 갖지않는것.
마음을일으키지않는것.
그건 도대체 어떤것일까.
정말 무게가없다는것....
그상태에 도달하면 글의 패턴은 틀림없이 달라질것이다.
그것은 자유다
자유의 상태에서만이 제대로된글을 쓸수있다.
이렇게 해야한다 저렇게해야한다라는 고정관념이 없는세상.
그곳.
물론 나는아직이쪽강기슭에 있지만 맘만먹으면언제든제 저쪽으로 갈수있는것이다
물론 단하나를 걸어야한다.
그것은 바로 목숨이다.
절절하게하라 절절하게 절절함이 모든것을 바꿀것이다.
그는안다. 어떻게 마음을 먹으면 여기에서 벗어날수있는지를...
그는 유리병같은 병실에 하루종일을 누워있다.
그러나 그는여기에 존재하는것이아니다.
그는 지금 여행자이다. 눈을뜨면 이곳을로 돌아오곤하지만 그것은 아주 가끔이다.
눈을 감으면 그는 어디먼 장소의 이름도 낮선 그런곳을 걷고있다.
틀림없이 걷고있다. 그것은 그에게 엄연한 현실이다. 그는 그곳에 존재한다.
글은 진행된다. 앞으로나아간다. 변화한다. 진화한다. 스스로진화한다.
내가 쓰는것이아니라 글이 스스로의 힘으로 진화한다.
그건 내가 쓰는것이아니다.
나는 어떤궤도에 그것을 올려놓는것이다.
틀림없다. 그것이다.
글은 한문장을 쓰는이상 스스로 생명을 갖고 살아남는다.
물론내안에 그대로 죽어버린글들도존재하지만
나는아직죽지않았기에 글은 나를 숙주로 더많이 더깊이 더오래 살아나갈것이다.
그건더이상 내가 살아가는것이아니다.
글을쓰는동안글이 살아가는것이다.
아마도 나는 오랫동안 이것을찾아헤맨건지도모르겠다.
나의삶은 이미나의삶이아니다.
나는 단지 글의 숙주로서 건강하게 의무를다하고 죽는날을 기다리는 매개체일뿐이다.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모두 끝났다.
이제 무엇이 찾아올지 기다리는것이다. 그안에서 귀를 기울이는것이다.
대합조개처럼...조용히...
그러나 무엇이 찾아올지 나는도저히 알수없다.
아마도 나의 그릇만큼이겠지.
그러니 그릇을부지런히 비워야한다.
무언가 꽉차있으면 그만큼 들어올공간이 좁아지는것이다.
" 자신이 피아노를 치지만 자신이 치는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피아니스트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피아노를 치는것이라고 생각하지않습니다. 정말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물었지만 그는 정말 자신이 피아노를 치는것이라고 생각하지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무엇을 쳐야겠다는어떤 계획도없이 건반앞에 앉기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지 조용히 귀를기울입니다. 무엇에 귀를 기울이는가하면 마음속에 귀를기울입니다.
그러면 어떤 파동이 일어남이 감지됩니다. 그파동이 감지되면 손가락을 건반위에 살짝올려놓습니다.
그러면 놀라운일이 일어나지요. 파동은 손가락을 타고 피아노를 누릅니다.
그리고 서서히 어떤 음율을 만들어갑니다. 그렇게 나는 유명한 피아니스트가되었습니다.
하번 연주한음악은 두번다시연주하지않습니다. 아니 두번다시 연주할수없습니다.
저에겐 악보란 존재하지않지요 그리고 아무리 멋지고 휼륭한음악도 절대 두번은 연주할수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무대에서만 연주할수있습니다.
어떤관객은 제공연을 보고 다시 그곡을 듣고싶다고 청하지만 그곡은 이미사라졌습니다.
이세상어디에도 존재하지않죠. 단지 그것을 들은사람과 연주한 나의 머릿속에 기억으로 밖에는남아있지않습니다. 그연주가 시작된순간부터 그연주는 사라지기시작한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 잘할수없을것이라는 두려움을 바라보는것이 가자힘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연주를 잘할수없을지도몰라..라는생각이 들면 두려움이 일기시작합니다.
그러면 정말 아무파동도느낄수가없습니다.
그런날은연주를 할수가없지요.
온관객에게 모두 환불해줍니다. 물론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피해를입으니까 연주를 해야해라고할수없습니다. 피해는피해이고 연주는연주이고 두려움은 두려움입니다.그것들은 각기 맡은바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이길지 연주하려는 파동이이길지 그것은 제문제가아닙니다.
즉 제가 어떻게 할수있는문제가 아니란말입니다. 그걸알기까지 꽤오랜시간이 걸렷지만 어쨌든 저는 그것을 확실하게 알게되었습니다. 왜 제가 그런일을 알게되었냐면..아마도 왜 이런현상이일어나는것일까를 굉장히 궁금해했기때문이 아닌가하는생각이듭니다. 저는 도대체 파동은 어디서 오고 연주는 어떻게되는것인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연주를 하지않을때는 절대알수가없는겁니다. 그러데 막상연주를 시작하면 역시 그파동이 모든것을 압도해서 도대체 이런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건지 알수없습니다.
그는 눈을 감는다.
이제 그는어디든갈수있다.
글을 써서 어디에 도달할것인가. 하는문제는...
아마 어디에도 도달할수는없다..라는것이 답이아닐가.
어디에 도달하는게 아니다.
어디에 도달할수없는것이다. 본질적으로 ...
이야기의 힘은 강하다.
이야기의힘은어떤 정치적인 힘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한힘을가지고있다.
그걸 사용하는것이다. 마음씀씀이....글을쓰는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것인가가아니라.
지금 무엇을 쓰고잇는가하는문제이다.
음악을 한번들이 감정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아니라. 그음악을 완전히 흡수하는것.
모든것은이미나를 변화시킨다.
이미 존건은 성숙되어있다.
이미 모든것은 갖추어져있다.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려하지말라
앞이라는것은존재하지않으니
앞으로 나아가려는생각때문에 모든세계가 생겨난다.
앞으로나아가려는 의도 욕망 다른것. 이것이 아닌것. 다른곳, 다른사람...그런것은 결국은 존재하지않는개념일뿐이다.
아무리 다라가봐야 그것을 잡을수없다.
개경주처럼. 그것은 먼저달리도록 프로그래밍화되어잇는것이다.
그 고깃덩어리를 잡을수있다는 생각을 버리면
그것을가질수있다는생각을 버리면
나는 비로소 그곳으로들어갈수있다.
나는 비로소 그안으로 들어가 거기에 머물수있다.
다시는돌아오지않는다.
이미지나간자....어디에도 존재하지않는자....
글은 그것의 도구이다.
이야기의 힘은 그흔적이다.
그순간을 잡을수없기에 나는그저 글을 어떤 도구로서 사용하고싶은것이다.
그것이 맞는것이다.
올바른길이다. 글을통해 무엇을 해야한다,혹은 무언가를 이루어야한다라는생각을 내려놓는다.
그런데 정말 그것은 어떤것일까.
내려놓는다라는것은 어던것일까
무게를 갖지않는것.
마음을일으키지않는것.
그건 도대체 어떤것일까.
정말 무게가없다는것....
그상태에 도달하면 글의 패턴은 틀림없이 달라질것이다.
그것은 자유다
자유의 상태에서만이 제대로된글을 쓸수있다.
이렇게 해야한다 저렇게해야한다라는 고정관념이 없는세상.
그곳.
물론 나는아직이쪽강기슭에 있지만 맘만먹으면언제든제 저쪽으로 갈수있는것이다
물론 단하나를 걸어야한다.
그것은 바로 목숨이다.
절절하게하라 절절하게 절절함이 모든것을 바꿀것이다.
그는안다. 어떻게 마음을 먹으면 여기에서 벗어날수있는지를...
그는 유리병같은 병실에 하루종일을 누워있다.
그러나 그는여기에 존재하는것이아니다.
그는 지금 여행자이다. 눈을뜨면 이곳을로 돌아오곤하지만 그것은 아주 가끔이다.
눈을 감으면 그는 어디먼 장소의 이름도 낮선 그런곳을 걷고있다.
틀림없이 걷고있다. 그것은 그에게 엄연한 현실이다. 그는 그곳에 존재한다.
글은 진행된다. 앞으로나아간다. 변화한다. 진화한다. 스스로진화한다.
내가 쓰는것이아니라 글이 스스로의 힘으로 진화한다.
그건 내가 쓰는것이아니다.
나는 어떤궤도에 그것을 올려놓는것이다.
틀림없다. 그것이다.
글은 한문장을 쓰는이상 스스로 생명을 갖고 살아남는다.
물론내안에 그대로 죽어버린글들도존재하지만
나는아직죽지않았기에 글은 나를 숙주로 더많이 더깊이 더오래 살아나갈것이다.
그건더이상 내가 살아가는것이아니다.
글을쓰는동안글이 살아가는것이다.
아마도 나는 오랫동안 이것을찾아헤맨건지도모르겠다.
나의삶은 이미나의삶이아니다.
나는 단지 글의 숙주로서 건강하게 의무를다하고 죽는날을 기다리는 매개체일뿐이다.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모두 끝났다.
이제 무엇이 찾아올지 기다리는것이다. 그안에서 귀를 기울이는것이다.
대합조개처럼...조용히...
그러나 무엇이 찾아올지 나는도저히 알수없다.
아마도 나의 그릇만큼이겠지.
그러니 그릇을부지런히 비워야한다.
무언가 꽉차있으면 그만큼 들어올공간이 좁아지는것이다.
" 자신이 피아노를 치지만 자신이 치는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피아니스트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피아노를 치는것이라고 생각하지않습니다. 정말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물었지만 그는 정말 자신이 피아노를 치는것이라고 생각하지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무엇을 쳐야겠다는어떤 계획도없이 건반앞에 앉기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지 조용히 귀를기울입니다. 무엇에 귀를 기울이는가하면 마음속에 귀를기울입니다.
그러면 어떤 파동이 일어남이 감지됩니다. 그파동이 감지되면 손가락을 건반위에 살짝올려놓습니다.
그러면 놀라운일이 일어나지요. 파동은 손가락을 타고 피아노를 누릅니다.
그리고 서서히 어떤 음율을 만들어갑니다. 그렇게 나는 유명한 피아니스트가되었습니다.
하번 연주한음악은 두번다시연주하지않습니다. 아니 두번다시 연주할수없습니다.
저에겐 악보란 존재하지않지요 그리고 아무리 멋지고 휼륭한음악도 절대 두번은 연주할수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무대에서만 연주할수있습니다.
어떤관객은 제공연을 보고 다시 그곡을 듣고싶다고 청하지만 그곡은 이미사라졌습니다.
이세상어디에도 존재하지않죠. 단지 그것을 들은사람과 연주한 나의 머릿속에 기억으로 밖에는남아있지않습니다. 그연주가 시작된순간부터 그연주는 사라지기시작한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 잘할수없을것이라는 두려움을 바라보는것이 가자힘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연주를 잘할수없을지도몰라..라는생각이 들면 두려움이 일기시작합니다.
그러면 정말 아무파동도느낄수가없습니다.
그런날은연주를 할수가없지요.
온관객에게 모두 환불해줍니다. 물론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피해를입으니까 연주를 해야해라고할수없습니다. 피해는피해이고 연주는연주이고 두려움은 두려움입니다.그것들은 각기 맡은바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이길지 연주하려는 파동이이길지 그것은 제문제가아닙니다.
즉 제가 어떻게 할수있는문제가 아니란말입니다. 그걸알기까지 꽤오랜시간이 걸렷지만 어쨌든 저는 그것을 확실하게 알게되었습니다. 왜 제가 그런일을 알게되었냐면..아마도 왜 이런현상이일어나는것일까를 굉장히 궁금해했기때문이 아닌가하는생각이듭니다. 저는 도대체 파동은 어디서 오고 연주는 어떻게되는것인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연주를 하지않을때는 절대알수가없는겁니다. 그러데 막상연주를 시작하면 역시 그파동이 모든것을 압도해서 도대체 이런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건지 알수없습니다.
그는 눈을 감는다.
이제 그는어디든갈수있다.
한없이 슬프고 외로운영혼에게
한없이 슬프고 외로운 영혼에게
깊디 깊은 슬픔에는 눈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조차 없다.
나는 슬픔을 견딜 수 없어서 소리를 내어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 수가 없었다.
눈물을 흘리기에는 너무나 나이를 먹었고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경험했다.
이 세계에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슬픔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깊은 슬픔이 눈물마저도 빼앗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고 혹시라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런 슬픔은 다른 어떤 형태로도 바뀌어지지 않고,다만 한 줄기 바람도 불어오지 않는 밤에 내리는 눈처럼 그냥 마음에
조용히 쌓여가는 그런 애달픈 것이다.
조용히 쌓이는 눈은 슬프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을 때 나는 그런 슬픔을 어떻게 해서든지 언어로 표현해 보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아무에게도 전달할 수 없었고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도 전할 수 없어서 그만 단념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언어를 폐쇄시키고 나의 마음을 굳게 닫아 버렸다.
깊디 깊은 슬픔에는 눈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조차 없다.
나는 슬픔을 견딜 수 없어서 소리를 내어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 수가 없었다.
눈물을 흘리기에는 너무나 나이를 먹었고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경험했다.
이 세계에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슬픔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깊은 슬픔이 눈물마저도 빼앗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고 혹시라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런 슬픔은 다른 어떤 형태로도 바뀌어지지 않고,다만 한 줄기 바람도 불어오지 않는 밤에 내리는 눈처럼 그냥 마음에
조용히 쌓여가는 그런 애달픈 것이다.
조용히 쌓이는 눈은 슬프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을 때 나는 그런 슬픔을 어떻게 해서든지 언어로 표현해 보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아무에게도 전달할 수 없었고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도 전할 수 없어서 그만 단념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언어를 폐쇄시키고 나의 마음을 굳게 닫아 버렸다.
나의 여행법 -하루키상
나의 여행법 : 여행하면서 쓰고, 쓰면서 여행한다
나는 여행지에서는 쓰기를 잊어버리려고 한다. 카메라도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내 눈으로여러 가지를 정확히 보고 머릿속에 정경이나 분위기, 소리 같은 것을 생생하게 새겨 넣는 일에 집중한다. 나 자신이 그 자리에서 녹음기가 되고 카메라가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오늘날은 여행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여행에 대해서 글을 쓰고, 나아가 여행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슨다는 것은 참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다. 정말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는 해외 여행이란 것이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다 마코토가 <무엇이든 보겠다>를 썼던 시대와는 다른 것이다. 가려고 생각만 하면, 즉 그럴 마음이 있고, 거기 드는 비용만 준비되기만 하면 대충 세계 어느 나라에라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정글에도 갈 수 있고, 남극에도 갈 수 있다. 단체 여행도 물론 가능하다.
그래서 여행에 관해서라면, 설사 아무리 먼 벽지에 가더라도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먼저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도하 계획이나 지나친 의욕 같은 것은 배제하고, "다소 비일상적인 일상"으로 여행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현대의 여행기는 시작되어야만 한다. "잠시 어디 좀 갔다 오겠네"하는 것은 좀 극단적이겠지만...... "눈을 부릅뜨고 결의를 새롭게"하는 느낌이라면 읽는 쪽에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미국대륙을 자동차로 횡단하는 것과, 시코쿠에서 사흘 내내 하루 세 끼를 오로지 우동만 계속 먹어대는 것 중 도대체 어는 쪽이 변경(邊境)인지 잘 모르겠다. 참 어려운 시대다.
나는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그렇게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짤막하게 적어 놓을 뿐이다.
가령 "보자기 아주머니!"라고 적어 넣고, 나중에 수첩을 펼쳐 그것을 보면, 아, 그렇지, 터키와 이란의 국경 근처의 그 작은 마을에 그런 이색적인 아주머니가 있었지, 하고 쉽게 생각해 낼 수 있게 해 놓은 것이다. 요컨대 내가 가장 알아보기 쉬운 형태의 헤드라인이면 된다. 바다에 부표를 띄우듯이 그렇게 적어 놓는다. 서류 서랍의 색인과 같다.
나는 여러 차례 여행을 하는 동안 점점 나 자신에게 적합한 방법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일시나 장소 이름이나 여러 가지 숫자 같은 것은 잊어버리면 글을 쓸 때 현실적으로 곤란하니까, 자료로서 가능한 한 꼼꼼히 메모해 두는데, 세밀한 기술이나 묘사는 될 수 있는 대로 기록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장에서는 글쓰기를 잊어버리려고 한다. 카메라 같은 것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여분의에너지를 가능한 한 절약하고, 그 대신 눈으로 여러 가지를 정확히 보고, 머릿속에 정경이나 분위기, 소리 같은 것을 생생하게 새겨 넣는 일에 의식을 집중한다. 호기심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어쨋든 그때그때 눈앞의 모든 풍경에 나 자신을 몰입시키려 한다. 모든 것이 피부에 스며들게 한다. 나 자신이 그 자리에서 녹음기가 되고 카메라가 된다. 내 경험으로 보건데 그렇게 하는 쪽이 나중에 글을 쓸 때도 훨씬 도움이 된다. 반대로 말한다면, 일일이 사진을 보지 않으면 모습이나 형태가 생각나지 않는 경우에는, 살아 있는 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취재 여행을 가더라도 작가는 겉으로 보기엔 편하다. 현장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만 잠자코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다. 사진을 맡은 사람만이 바쁘게 뛰어 다닌다. 그 대신 작가는 여행지에서 돌아오고 나서부터가 힘이 든다. 사진은 현상을 하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작가는 그때부터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 메모한 단어에 의지해 머릿속에 여러 가지 현장을 재현시켜 가는 것이다.
대개 귀국해서 한 달이나 두 달쯤 지나고 나서 작업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경험적으로 그 정도 간격을 두는 것이 결과가 좋은 것 같다. 그 동안 가라앉아야 할 것은 가라앉고, 떠 올라야 할 것으 떠오른다. 그리고 떠오른 기억만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의 굵은 라인이 형성된다. 잊어버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다만 그 이상 오래 내버려 두면 잊어버리는 것이 너무 많아 문제다. 모든 일에는 어디까지나 '적당한 시기'라는 것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여행기를 쓰는 것은 나에게 매우 귀중한 글쓰기 수업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여행기에서 원래 해야 할 일은 소설의 원래 기능과 거의 마찬가지다. 대개의 사람들은 여행을 한다. 예를 들면 대개의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 것과 같은 문맥으로.
하지만 그런 문제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얘기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이런 곳에도 갔었단다, 이런 생각을 했단다 하고 누군가에게 얘기해도, 자신이 정말 그곳에서 느낀 것을, 그 감정의 차이 같은 것을 생생하게 상대방에게 전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에게, "아아, 여행이라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것이구나. 나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 "연애란 그렇게 멋진 일이구나. 나도 멋진 연애를 해보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그보다 더욱 어렵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어떻게든 하게 만드는 것이 프로의 글이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거기에는 기술도 필요하고, 고유의 문체도 필요하며, 열의나 애정이나 감동도 물론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기를 쓰는 것은 소설가인 나에게도 아주 좋은 공부가 되었다. 처음엔 좋아서 썼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나는 원래 여행이라는 것을 좋아했다. 옛날부터 좋아했다. 헤딘이나 스탠리라든가, 어렸을 때부터 그런 사람들의 여행기를 닥치는 대로 읽으며 자랐다. 동화 같은 것보다는 아무튼 '변경 이야기'를 특히 좋아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스탠리가 고생에 고생을 거듭하면서 콩고의 오지에서 행방불명된 리빙스턴 탐험대를 찾아내는 장면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새로운 것으로는 폴 세로우의 여행기도 잘 읽어싸. 잘 쓰여진 여행기를 읽는 것은 자신이 직접 여행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렇게 누구나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어서, 이제 변경이라는 것이 없어져 버렸고, 모험의 질도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탐험'이나 '비경'과 같은 말은 점점 진부해져서 현실적인 수준에서는 거의 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지금도 '비경' 어쩌고 하는 옛날식 타이틀을 붙인 방대한 프로를 방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고지식한 사람은 실제로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여행기를 쓰기에는 그다지 행복한 시대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여행을 하는 행위가 그 본질상 여행자의 의식의 변혁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여행을 묘사하는 작업 역시 그 움직임을 반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 본질은 어는 시대에나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여행기라는 것이 지닌 본래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디어디에 갔었습니다.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했습니다"하고 재미와 신기함을 나열하듯 죽 늘어놓기만 해서는 사람들이 좀처럼 읽어 주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일상으로부터 떨어지면서도, 동시에 어는 정도 일상에 인접해 있는가'하는 것을 (차례가 거꾸로 되더라도 좋으니까) 복합적으로 밝혀 나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정말 신선한 감동은 거기서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처럼 변경이 소멸한 시대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 속에는 아직까지도 변경으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추구하고 확인하는 것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 그런 궁극적인 추구가 없다면, 설사 땅 끝가지 간다고 해도 변경은 아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시대이다
나는 여행지에서는 쓰기를 잊어버리려고 한다. 카메라도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내 눈으로여러 가지를 정확히 보고 머릿속에 정경이나 분위기, 소리 같은 것을 생생하게 새겨 넣는 일에 집중한다. 나 자신이 그 자리에서 녹음기가 되고 카메라가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오늘날은 여행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여행에 대해서 글을 쓰고, 나아가 여행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슨다는 것은 참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다. 정말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는 해외 여행이란 것이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다 마코토가 <무엇이든 보겠다>를 썼던 시대와는 다른 것이다. 가려고 생각만 하면, 즉 그럴 마음이 있고, 거기 드는 비용만 준비되기만 하면 대충 세계 어느 나라에라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정글에도 갈 수 있고, 남극에도 갈 수 있다. 단체 여행도 물론 가능하다.
그래서 여행에 관해서라면, 설사 아무리 먼 벽지에 가더라도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먼저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도하 계획이나 지나친 의욕 같은 것은 배제하고, "다소 비일상적인 일상"으로 여행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현대의 여행기는 시작되어야만 한다. "잠시 어디 좀 갔다 오겠네"하는 것은 좀 극단적이겠지만...... "눈을 부릅뜨고 결의를 새롭게"하는 느낌이라면 읽는 쪽에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미국대륙을 자동차로 횡단하는 것과, 시코쿠에서 사흘 내내 하루 세 끼를 오로지 우동만 계속 먹어대는 것 중 도대체 어는 쪽이 변경(邊境)인지 잘 모르겠다. 참 어려운 시대다.
나는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그렇게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짤막하게 적어 놓을 뿐이다.
가령 "보자기 아주머니!"라고 적어 넣고, 나중에 수첩을 펼쳐 그것을 보면, 아, 그렇지, 터키와 이란의 국경 근처의 그 작은 마을에 그런 이색적인 아주머니가 있었지, 하고 쉽게 생각해 낼 수 있게 해 놓은 것이다. 요컨대 내가 가장 알아보기 쉬운 형태의 헤드라인이면 된다. 바다에 부표를 띄우듯이 그렇게 적어 놓는다. 서류 서랍의 색인과 같다.
나는 여러 차례 여행을 하는 동안 점점 나 자신에게 적합한 방법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일시나 장소 이름이나 여러 가지 숫자 같은 것은 잊어버리면 글을 쓸 때 현실적으로 곤란하니까, 자료로서 가능한 한 꼼꼼히 메모해 두는데, 세밀한 기술이나 묘사는 될 수 있는 대로 기록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장에서는 글쓰기를 잊어버리려고 한다. 카메라 같은 것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여분의에너지를 가능한 한 절약하고, 그 대신 눈으로 여러 가지를 정확히 보고, 머릿속에 정경이나 분위기, 소리 같은 것을 생생하게 새겨 넣는 일에 의식을 집중한다. 호기심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어쨋든 그때그때 눈앞의 모든 풍경에 나 자신을 몰입시키려 한다. 모든 것이 피부에 스며들게 한다. 나 자신이 그 자리에서 녹음기가 되고 카메라가 된다. 내 경험으로 보건데 그렇게 하는 쪽이 나중에 글을 쓸 때도 훨씬 도움이 된다. 반대로 말한다면, 일일이 사진을 보지 않으면 모습이나 형태가 생각나지 않는 경우에는, 살아 있는 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취재 여행을 가더라도 작가는 겉으로 보기엔 편하다. 현장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만 잠자코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다. 사진을 맡은 사람만이 바쁘게 뛰어 다닌다. 그 대신 작가는 여행지에서 돌아오고 나서부터가 힘이 든다. 사진은 현상을 하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작가는 그때부터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 메모한 단어에 의지해 머릿속에 여러 가지 현장을 재현시켜 가는 것이다.
대개 귀국해서 한 달이나 두 달쯤 지나고 나서 작업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경험적으로 그 정도 간격을 두는 것이 결과가 좋은 것 같다. 그 동안 가라앉아야 할 것은 가라앉고, 떠 올라야 할 것으 떠오른다. 그리고 떠오른 기억만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의 굵은 라인이 형성된다. 잊어버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다만 그 이상 오래 내버려 두면 잊어버리는 것이 너무 많아 문제다. 모든 일에는 어디까지나 '적당한 시기'라는 것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여행기를 쓰는 것은 나에게 매우 귀중한 글쓰기 수업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여행기에서 원래 해야 할 일은 소설의 원래 기능과 거의 마찬가지다. 대개의 사람들은 여행을 한다. 예를 들면 대개의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 것과 같은 문맥으로.
하지만 그런 문제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얘기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이런 곳에도 갔었단다, 이런 생각을 했단다 하고 누군가에게 얘기해도, 자신이 정말 그곳에서 느낀 것을, 그 감정의 차이 같은 것을 생생하게 상대방에게 전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에게, "아아, 여행이라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것이구나. 나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 "연애란 그렇게 멋진 일이구나. 나도 멋진 연애를 해보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그보다 더욱 어렵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어떻게든 하게 만드는 것이 프로의 글이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거기에는 기술도 필요하고, 고유의 문체도 필요하며, 열의나 애정이나 감동도 물론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기를 쓰는 것은 소설가인 나에게도 아주 좋은 공부가 되었다. 처음엔 좋아서 썼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나는 원래 여행이라는 것을 좋아했다. 옛날부터 좋아했다. 헤딘이나 스탠리라든가, 어렸을 때부터 그런 사람들의 여행기를 닥치는 대로 읽으며 자랐다. 동화 같은 것보다는 아무튼 '변경 이야기'를 특히 좋아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스탠리가 고생에 고생을 거듭하면서 콩고의 오지에서 행방불명된 리빙스턴 탐험대를 찾아내는 장면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새로운 것으로는 폴 세로우의 여행기도 잘 읽어싸. 잘 쓰여진 여행기를 읽는 것은 자신이 직접 여행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렇게 누구나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어서, 이제 변경이라는 것이 없어져 버렸고, 모험의 질도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탐험'이나 '비경'과 같은 말은 점점 진부해져서 현실적인 수준에서는 거의 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지금도 '비경' 어쩌고 하는 옛날식 타이틀을 붙인 방대한 프로를 방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고지식한 사람은 실제로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여행기를 쓰기에는 그다지 행복한 시대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여행을 하는 행위가 그 본질상 여행자의 의식의 변혁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여행을 묘사하는 작업 역시 그 움직임을 반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 본질은 어는 시대에나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여행기라는 것이 지닌 본래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디어디에 갔었습니다.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했습니다"하고 재미와 신기함을 나열하듯 죽 늘어놓기만 해서는 사람들이 좀처럼 읽어 주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일상으로부터 떨어지면서도, 동시에 어는 정도 일상에 인접해 있는가'하는 것을 (차례가 거꾸로 되더라도 좋으니까) 복합적으로 밝혀 나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정말 신선한 감동은 거기서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처럼 변경이 소멸한 시대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 속에는 아직까지도 변경으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추구하고 확인하는 것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 그런 궁극적인 추구가 없다면, 설사 땅 끝가지 간다고 해도 변경은 아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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