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31일 목요일
해변의 카프카는 어떻게 쓰여졌는가
<해변의 카프카>는 어떻게 쓰여졌는가? (1)
――<해변의 카프카>라는 제목은 어떻게 결정됐습니까?
언제 생각났는지. 잘 기억하지 않는데 쓰기 시작한지 한참 지나서였던 것 같아요. 카프카는 물론 제가 좋아하는 작가이고 그 음감도 좋았어요.<해변의 카프카>란, 뭔가 이미지를 상기시키는 게 있지요? 무슨 바람에 문득 생각나서, 머리 속에서 한참 그 울림을 굴려 봤다가 "자, 이걸로 하자" 생각했어요. 그 뒤로부터는 다른 제목이라는 게 생각나지 않았지요.
――영어로는 Kafka on the shore 인데, 처음엔 영어로 생각났다는 건 아닌가요?
<아인슈타인 온 더 비치>라는 유명한 연극도 있지만, 그런 것을 특별히 관련시켜서 생각하진 않았네요. 그리고 저의 경우는 on the beach라기보다 on the shore라는 이미지니까, 그건 좀 감각이 다르겠지요. 바다와 육지가 접하는 곳, 이랄까요?
――어떤 페이스로 쓰셨습니까?
집필의 일과라는 것이 저의 경우, 아주 엄밀하게 정해져 있어요. 아침에 쓴다. 밤에는 안 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 아침은 아무리 늦더라도 4시에는 일어나요. 더 일찍 일어나는 날도 종종 있어요. 3시라든가. 자명종을 맞혀 두지 않아도, 몸이 스스로 확 깨지는 거에요.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자 곧 책상을 향해 쓰기 시작해요.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서 4시간이나 5시간 계속 써요. 완성되는 것은 400자 원고지로 말하면 딱 10장. 그보다 많이 쓰지도 않고 적게 쓰지도 않는다. 그것도 게임의 룰 같은 거에요. 룰이라는 것은 그런대로 중요한 거에요.
그리고는 운동을 하고, 오후엔 대개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거나 번역을 하거나 해요. 짧은 낮잠을 자기도 하고. 밤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음악을 듣거나 비디오를 보고 9시쯤에는 잠들지요. 나이트 라이프 따위 것은 통 없어요.
그런 작업을 매일 계속하고 있으면, 그 반복 리듬 속에 제가 쑥 들어가는 것이 느껴져요. 들어가서 일을 하고, 그리고 나온다.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에 대해, 기계적인 반복을 바보 취급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렇지는 않아요. 반복성에는 확실히 주술적인 것이 있습니다. 정글 안에서 들려 오는 드럼의 울림처럼 말이지요. 거기에 자기를 자연스럽게 동화시키는 것이 중요해요. 들어가고 싶을 때 들어갈 수 있고 나오고 싶을 때 나올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 놓는다. 단, 바른 반복을 하기 위해서는 꽤 피지컬한 기조 체력이 필요해요. 깊게 집중하면서, 게다가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거니까요. 보통 사람... 이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훈련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물론 세상에는 선천적으로 그런 자재한 능력을 지닌 사람도 있겠지만요.
그런 식으로 하루에 10장 쓰고, 한 달에 300장, 반년에 1800장. 그걸로 완성이에요. 거기서부터 분량을 줄이면서 고쳐 썼다 결국 1600장 정도로 됐습니다.
――쓰기 시작하신 건 언제쯤이었어요?
좀 재미있는 일인데, 막 야구 시즌의 개막과 동시에 쓰기 시작해서, 야쿠르토가 우승을 거드는 무렵에 제1고를 완성시켰어요. 이 점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똑같더라고요. 그 때도 개막 날에 쓰기 시작해서, 우승이 결정되는 무렵에 완성시켰다. 히로오카 감독 아래 첫 우승을 했을 때 말이지요. 무슨 인연 같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반년 동안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써 나간다는 것은 저에게는 정신적으로도 힘드는 일이었어요. 계속 숨이 막히게 집중해서 쓰는 거니까요. 저는 20년째 날마다 런닝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런 축적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체력은 중요하지요, 정말. 문장을 쓰기에는 하반신이 중요한 거에요. 메타포 깉은 것이 아니고 그 글자대로 다리와 허리가 단단하지 못하면 좋은 문장을 쓸 수는 없는 법이에요. 물론 아까도 말했듯이 천재는 예외이고, 저와 같은 정도의 재주를 가진 인간에 대해서 말하면 말이지만.
――아침 4시부터 9시란 뭔가 이유가 있는 건가요?
아침을 좋아하거든요. 옛날에 바 같은 걸 경영하고 있어서, 그때는 물론 야행성의 인간이었는데. 새벽에 자고 점심 때쯤에 일어나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가게를 그만두었을 때, "이제부터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날이 새기와 동시에 일어나려고. 인생의 리셋 같은 걸로 삼아서요. 그리고 또 하나는, 어둠 속에서 일을 시작하고, 일을 하는 새 점점 날이 밝아진다는 것이 느낌으로서 좋다는 것. 뭔가 제가 쓰고 싶은 작품세계를 바로 상징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 있어서요.
가끔씩 일을 시작할 때쯤에 장난삼아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어 보곤 해요. 아침 4시 쯤에 말이지요. 물론 연락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러는 건데, 그러면 편집자들은 아직도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거에요. 참 신기하지요?
<해변의 카프카>는 어떻게 쓰여졌는가? (2)
――집필중엔 어떤 음악을 들으십니까? 식사는요?
아침은 바로크 음악을 들으면서 일을 하네요. 작은 소리로 바로크 음악을 틀어 놓고 말이지요. 대개는 실내악이나 기악. 하지만 글렌 굴드는 안 돼요. 그것이 들려 오면 그만 그 소리에 빠져 버리거든요. 일을 하면서 듣기에는 좀더 온화하고 중립적인 소리가 좋은 거에요. 뭐, 이번엔 prince나 radiohead도 제법 들었지만요(웃음). 식사는 적당히 센드위치 같은 것을 먹어요. 부엌에 가서 혼자 만들어 먹지요. 일을 하는 중에는 아무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거든요.
――써 나가기가 힘들 경우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가시는지요?
쓰기가 어려운 부분이란 건 물론 있어요. 하지만 너무 신경을 쓰지 않고 척척 써가는 거에요. 너무 자세한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않고요. 그런 것은 나중에 시간을 들여 고쳐 쓰면 되니까. 그것보다는 이야기의 진행 속도에 늦지 않게, 필사적으로 그것에 매달려 간다. 그게 더 중요해요.
――표지에 그려져 있는 두 가지 오브제에 대해 가르쳐 주세요.
표지에 그려져 있는 고양이 인형과 뱀을 그린 돌. 그것은 둘 다 제 것이에요. 언제나 책상 위에 놓아 있지요. 고양이는 어디서 샀던가? 생각이 나지 않네요. 뱀은 시드니 올림픽을 취재하러 갔을 때 토산물 가게서 샀어요. 둘 다 소설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듯싶어서 표지에서 쓰기로 했어요.
제 책상 위에는 제법 여러가지 물건이 놓여 있어요. 대개는 동물과 관련된 것이에요. 그리고 개구리나 벌이나 쥐, 그런 것도 있어요. 일을 잠깐 쉴 때 그런 것들을 보곤 하는데, 그들이 다 함께 저를 격려해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도 조금은 있겠네요. 동물이란 건 좋더군요.
――이번 소설을 쓰기 위해서, 취재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시코쿠(四國)에는 실제로 갔어요. 저는 원래 소설의 취재라는 걸 별로 안하는 편인데, 사실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곤란하니까 일단 가서 알아 봤지요. 실제로 혼자 야행 고속버스로 가서, 렌타카에서 마츠다 파미리아를 빌려서 그 주편을 돌아 봤어요. 그다지 길지는 않았고요. 2박 3일 정도지요.
그런데, 쓰기 전에 예비 조사를 하러 갔다는 것이 아니라, 다 쓰고 난 다음에 확인하러 간 거에요. 쓸 때는 오로지 상상력을 구사해서 써요. 타카마츠(高松)에는 전에 몇 번인가 가 본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는 건 별로 없었으니까, 자기 머리 속에서 소설을 위한 장소를 제멋대로 만들어 가는 거에요. 그러고 나서, 그런 장소가 실제로 있는지를 확인하러 가요.
<태엽감는 새>를 쓸 때도 그랬군요. 거기엔 노몬한이 나오는데, 실제로 노몬한에 간 것은 책을 다 쓴 후였어요. 처음부터 조사를 하러 가면, 저의 경우는 말이지만, 상상력이 잘 작용되지 않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시코쿠를 무대로 삼아서 쓰고는 있어도, 결국 그것은 그 어디도 아닌 곳인 거에요, 저의 경우. 어느때도 아닌 시간 속의, 어디도 아닌 곳 말이에요. 그런데 이런 장소가 꼭 타카마츠 시의 어딘가에 있을 거야"하고 생각해서 쓰고 있으면, 꼭 그런 곳이 존재하는 법이에요. "아, 역시 있었구나" 하는 식으로. 그런 게 되게 기쁘지요. 모래사장에 앉아서 "그렇구나, 이런 곳이었구나" 하면서 이상하게 릴렉스하기도 하고요. 노몬한의 경우엔 "야! 바로 내가 쓴 대로의 곳이잖아" 같은 기시감(旣視感)까지 있었지만(웃음).
<양을 쫓는 모험>만은 미리 현지답사(location hunting) 같은 것을 했어요. 그러지 않으면 양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으니까(웃음). 실제로 가 봐서 양에 관한 일에는 이상하게 자세히 아는 사람이 됐어요. 그것이 지금까지 유일한 취재 조사지요.
왜 무대가 타카마츠냐는 질문을 받으면 곤란해요. 근거가 전혀 없으니까요. 하지만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소년의 행선지는 시코쿠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꽤 확실히 있었어요. 서쪽으로 향한다는 이미지가 있었고, 그것은 칸사이(關西)도 아니고 큐슈(九州)도 아니고 히로시마(廣島)도 아니다. 그렇다면 역시 시코쿠가 되겠지요. 타카마츠라는 도시를 저는 개인적으로 좋아해요. 뭔가 누긋하고, 우동도 맛있고요.
<태엽감는 새>부터 <해변의 카프카>까지
――<해변의 카프카>는 <태엽감는 새> 이래의 긴 소설이군요.
<태엽감는 새>를 다 썼을 때, 아무튼 자신 속에 있었던 소설적인 것을 all out로 다 내버린 느낌이었어요. 4년쯤이나 들여서 계속 긴 이야기를 쓰고 있었으니까요. 4년은 길었다. 그 동안 계속 미국에 살았거든요.
녹초가 되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후에 몇 개인가 단편 소설은 썼지만 장편 소설을 쓰려는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어요. 그 다음에 <언더 그라운드>를 쓰게 되는데, <언더 그라운드>는 논 픽션이랄까, 요컨대 받아쓰기이니까, 타인의 이야기를 채집하는 작업인 거에요. 척척 들이쉬어 가는 작업 말이지요. 그에 대해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때까지 담아둔 것을 내뺕는 작업이에요. 그런 의미에서는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었던 셈이에요. 1년간 들여서 되도록 뒤에 물러서서 자신의 숨을 죽이며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려, 그것을 자신 속에 쌓아 갔어요.
그러나, 자신 속에 일단 거두어들인 것을 소설의 형태로 잘 변환시키고 밖으로 내놓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역시 시간이 걸리는 거에요. 그렇게 쉽게, 쑥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쌓을 수 있을 만큼 쌓아 놓고는, 새가 알을 지키듯 꽉 품고 있어야 해요. 체험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의미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 시간은 길어지지요. 꾹 참아서 기다리고 있어야 해요.
<언더 그라운드>를 쓰고 나서 조금 지나다가, 어떻게든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스프트니크의 연인>을 썼어요. 저는 아무래도 소설가라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소설이 쓰고 싶어지는 거에요. 댐에 물이 괴는 듯한 느낌이에요. 하지만 그 시점에서는 아직 <언더 그라운드>의 작업을 하는 동안에 제가 intake한 것을 제대로 output하기 위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저 자신도 알고 있었어요. "나는 아직 중간 지점에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그래서 저로서는 <스프트니크의 연인>에서는 다음에 쓸 장편 소설을 위한 준비 같은 것을 해 놓으려고 생각 한 거에요. 야구로 말한다면, 샤프한 단타를 노리려고요. 장타를 노리는 것이 아니고 말이지요. 저는 그것을 위해서, 우선 문체의 정비를 해 보고 싶었어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때까지 제가 써 온 문체의 전체적인 복습 같은 것을 여기서 철저하게 해버리자고요. 그런 실험적인 것을 하기에는 그 정도 길이의 소설이 절호의 장소예요. 저는 "중편 소설"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단편이면 용기로서 너무 짧다, 하지만 본격적인 장편까지는 끌어가지 못한다, 그런 길이지요. 그러니까 그 <스프트니크의 연인>이라는 소설은 이야기라는 차원에서 보기 전에 문체의 쇼케이스 같은 것이 되어 있어요. 문체의 문제를 어디까지나 추구해 간 결과 이런 이야기가 됐습니다.
그 같은 소설을 쓰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어려웠어요. 그때까지 제가 써 온 문체를 전부 다 활동시켜서 쓴 것 같은 부분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쓰면서 "이런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했어요. 다음은 다른 것을 해야 한다고요. 그런 의미에서는 <스프트니크의 연인>은 위치적으로는 <댄스 댄스 댄스>와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어요. <댄스 댄스 댄스>를 쓴 후에 저는 <댄스 댄스 댄스>적인 것은 쓰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그 후 또 조금 지나서, 이번엔 통합적인 단편을 써 보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지요. 거기에서도 제가 가장 의식한 것은 문체의 문제였어요. 이번엔 모두 삼인칭으로, 여러가지 문체로, 한 가지 테마로, 각각 전혀 다른 종류의 이야기를 써 보기로 했어요. 그것을 하나로 통합해서 "콘셉트 앨범" 같은 것으로 만들려고요. 저는 그때까지 대개의 소설을 일인칭으로 써 왔기 때문에 삼인칭의 경험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도 아무튼 해 보자고 생각했어요. 왜 그런 생각을 했냐면, 여러가지의 보이스가 썪은 장편 소설을 앞으로 쓰려면은 삼인칭을 유효하게 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물론 일인칭만으로도 그런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해요. 그런 것은 순수하게 테크닉의 문제니까. 하지만 소설의 스케일을 한층 더 크게 하기 위해서는 보이스의 다양화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어요.
그런 기분이 된 것은 역시 <언더 그라운드>를 쓴 영향이 컸을 거에요. 그 일을 한 후, 한참 지나서부터도 여러 사람들의 보이스가 제 머리 속에서 계속 울리고 았어서, 존재감 같은 것이 제법 컸거든요. 아주 리얼하고 절박한 것이었어요. 저로서는 그러한 살갗의 감각을 소중히 하고 싶었어요. 그것이 제가 자신의 글을 어떤 차원에서는 개조하려고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여러가지 의미에서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는 <언더 그라운드>의 연장선 상에 있어요. <언더 그라운드>에서 주제로 한 지하철 사린 사건은 1995년 3월에 일어난 일이고,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의 테마가 되어 있는 코베(神戶)의 지진은 그 2 개월 전에 일어난 일이지요.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에 수록된 6 개의 단편 소설은 그 중간 지점인 1995년 2월에 일어난 일들을 그리고 있어요. 물론 그것은 의식적으로 한 거에요. "중간 지점"이라는 것은 제게 있어서 아주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요. 영어로 하면 "limbo"지요. 현세(現世)와 황천(黃泉)의 세계 사이에 있는 중간 지점.
15세의 주인공에 대하여 (1)
――15세의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것은 꽤 이른 단계에서 이미 정해져 있었나요?
네, 정해져 있었지요. 아무튼 15세 소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움직여 보자고.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잘 되어 갈 것 같았어요. 그것은 집필을 시작하기 1년 전에 결정했었고, 그 아이디어를 머리 속에서 계속 담그고 있었어요. 그 소년이 움직이기에 편한 환경을 의식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 간 거에요. 그러고 나서 이제 그런 환경이 정비되었다고 느꼈을 무렵부터 쓰기 시작했지요. 저는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누긋한 편이랄까, 잘 기다리는 편이에요. 꼼짝 않고. 타이밍이 거의 다예요.
――<스프트니크의 연인>의 종반 부분에 소년이 나오는데, 그의 인상이 아주 강했어요. 그 당근이라는 소년과 이번 소설에 나오는 소년과는 관련이 있는 건가요?
전혀 깨닫지 못했군요(웃음). 하긴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관련이 있을 지도 몰라요. 사실 그 <스프트니크의 연인>라는 소설에는 원래 당근이라는 소년이 나오지 않았어요. 나온다 해도 기호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런데 소설의 인상이 너무 희미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고쳐 쓰는 단계에서 자연스레 그의 존재가 부풀어 올라 왔어요. 스스로 부풀어 올라,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가 전면에 나옴에 따라 소설이 새로운 힘 같은 것을 지니기 시작했지요. 요컨대, 스미레가 차차 혈육을 잃어 가면서 그대신 당근이 점점 혈육을 지니기 시작했다. 그런 다이나미즘의 시프트가 있었던 거에요. 이 <해변의 카프카>에도 거기서 계속되는 부분은 있을 지도 모르네요. 전혀 의식하지는 않았고, 또 당근은 초등학생인데 이번 주인공은 15세이니까 연령적으로도 차이는 있지만요.
제 소설에는 지금까지 20대 후반부터 30대 전반쯤의 주인공이 많았는데, 그것을 이번엔 15세로 함으로써 소설적인 시점을 여러 방향으로 시프트할 수 있는 위치를 찾아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 자신이 아주 자유로워졌다는 감각이 있었어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라는 자립성 같은 것이 더욱 확실해졌다 랄까요.
소설을 쓴다는 작업에는 자신 속에 있는 다른 인격을 찾는 여행 같은 부분이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나 자신과 가까운 것으로 시점을 설정해 버리게되면 현재의 자신과 찾아야 할 대상으로서의 다른 자신이 뒤섞여질 우려가 있어요. 거기감 같은 것은 꽤 중요하다. 그런 것일 지도 모르네요.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한테 지적을 받아서 알게 된 것인데, <스프트니크의 연인>는 전반과 후반에서 문체가 달라져 있었다고요. 저는 몰랐는데 그런 말을 듣고 다시 읽고 보니 확실히 달라져 있더라고요. 그것은 요컨대, 전반 부분에 저는 자신의 기성의 문체 같은 것을 주저없이 과인할 정도로 써 가면서, 그것에 지친 것 같은 상태가 되었었겠지요. 그래서 그 시점에서 새로운 문체 같은 것이 쑥 나왔다는 게 아닐까요? 그런 작업이 비교적으로 자연스럽게 잘 되어 갔다는 감촉은 있었어요.
――하루키 씨는 15세 때 어떤 소년이셨습니까?
제가 15세 때는 약간 이상했을까요? 어떤 면에서는 아주 보통 아이여서 산에 오르고나 바다에서 수영하거나 해서 친구들과 활발하게 놀고 있었는데, 그러는 동시에 이상하게 독서를 좋아하는 아이였지요. 외아들이기도 해서 일단 틀어박히면 그만, 고독이라든가 참묵이라는 것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어요. 오오츠키(大月) 서점에서 나온 <맑스/엥겔스 전집>을 용돈으로 몇 권이나 사서 읽고 있었어요. <자본론> 같은 것은 당연히 너무 난해한, 그래도 상관 않고 읽다 보면 제법 이해할 수도 있더군요. 문장도 딱 확실하고 그런대로 느껴지는 데가 있어요. 카프카, 도스토에프스키는 물론 거의 다 독파했었지요. 그런 부분은 보통 아이가 아니었는지도 몰라요.
어떻든 책은 많이 읽었어요. 그리고 음악도 많이 듣고 있었지요. 모던 재즈에 빠진 것도 그 무렵이었어요. 가출은 안 했지만요(웃음). 저의 경우, 강렬히 내성적인 부분과, 그러면서 physical하고 easy한 부분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건 지금도 그대로나 마찬가지지만요. 인간이란 그렇게 달라지지 않는 거에요.
――소설을 쓸 때에 15세 때 자신의 이미지가 되살아난다는 일은 없었습니까?
그건 없어요. 없는데, 소설가라는 것은 일단 어떤 인물을 그리기 시작하면 그 인물 속에 깊이 빠져드는 거에요. 일단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것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가 있어요. 그렇다기보다는 그 사람이 되고 마는 거에요. 예를 들면 <스프트니크의 연인>에 스미레라는 여자애가 나오지요. 나이는 스무살 정도이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에 레즈비안이 되고 만다. 저는 물론 스무살 여자가 아니고 레즈비안도 아니에요. 게다가 레즈비안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식으로서는 전혀 몰라요. 그러나 제게는 스미레가 생각하는 것이나 바라는 것이 이해가 돼요. 그녀가 실제로 어떤 일을 할지도 알 수 있어요. 쓰고 있을 때는 뚜렷하게 말이지요.
그러니까, 주인공인 15세 소년은 15세 때의 저와는 전혀 달라요. 조금은 비슷한 데가 있을 지 모르지만 거의 딴 인격이에요. 그러나 저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 15세 소년이 될 수 있어요. 그라는 존재 속에 잠입할 수 있는 거에요. 전혀 새로운 선택지로서 저의 존재를 그의 존재 위에 겹쳐 올려 놓을 수가 있어요. 그것은 제게 있어서 아주 소중한 것이고, 동시에 독자에 있어서도 소중한 것이었으면 싶어요. 아주 소중한 것을 통해서 저와 소년과 독자가 연결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근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소설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요?
15세의 주인공에 대하여 (2)
주인공을 15세 소년으로 설정함으로 당연히 문체도 달라집니다. 이를테면 15세 소년은 그다지 훌륭한 비유를 쓰지는 못해요.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궁지라고도 할 만한 데서 빠듯하게 살고 있으니까, 문체도 따라서 크리스프(crisp)해지지요. 이야기를 유효하게 서바이브(survive)하기 위한 문장으로 되어 가는 거에요. 안 그럴 수가 없어요. 정교한 레토릭도 필요가 없게 되지요. 물론 문장은 꽤 주의 깊게 고쳐 썼는데 고치면 고칠수록 심플(simple)해지더군요. 그런 점이 지금까지의 제 문체와 다른 것으로 나타났을 지도 몰라요.
제가 특히 신경을 쓴 것은 15세 소년이 나온다고 해서 계몽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어요. 그를 인도해 준다든가, 그런 짓은 하지 않으려고요.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은 그가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 자기 머리로 판단하게 하는 것. 작자가 그를 인도해서는 안 돼요. 여러 가지 원형의 모습을 그에게 보여 주고 그것을 그가 스스로 이해하고 삼기고 받아들이게 해 주는 것. 그것이 작자에게 주어진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실무 언어적인 수준에서 말하면, 그가 쓰는 말들 중에서 되도록 "**적"이라는 표현을 근절해 버리고 싶었어요. 그러한 표현을 없애 버리고 더 솔직하고 더 자연스러운 말투로 하고 싶었던 거에요. 실제로는 유감스럽게도 근절하지는 못했고 아직 조금은 남아 있는데(웃음), 그래도 아주 적어졌어요. 역설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들 중에는 "**적"이라는 표현이 너무나 많다는 거지요. 조심해야 한다 싶었어요.
그래도 이 책을 읽고 주인공인 소년이 쓰는 말을 "이건 15세 아이가 쓰는 말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지 몰라요. 그런 비판은 아마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나는 말이에요, 그에게 소위 "15세 아이적인"말투를 바라지는 않았던 게에요. 그에게는, 말하자면 어떤 부분에서 메타피지컬한(metaphysical:형이상학적인) 의미를 가진 15세의 소년이기를 바랬어요. 책 안에 나오는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세계에서 제일 터프한 15세 소년"이기를 바란 거에요. 거기에는 예전에 <자본론>과 <악령>을 몰투하게 읽는 15세 소년이었던 저의 생활 자세 같은 것도 겹쳐져 있을 지도 몰라요. 그런 말투, 문체의 설정은 어려웠군요. 몇 번인가 전체의 톤(tone)을 변경했어요. 제일 신경을 쓴 것은 그런 부분이었을 지도 몰라요.
저는 지금 마침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새롭게 번역하고 있는데 그 역문의 톤 설정도 신경이 쓰여지는군요. 홀든 고울필드 군은 16세인데, <해변의 카프카>의 소년과는 다른 의미로 아주 어려워요. 어디까지가 소년의 부분이고 어디부터가 어른의 부분인지, 그 구분이 미묘한 거에요. 그만큼 보람도 많은 일이지만요.
――현대의 15세 소년 소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 젊은 사람에게 삶의 원형 같은 것을 순수한 형태로 제시해 간다는 작업의 중요성은 현실 세계에서도 픽션의 세계에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일상적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부모가 자신들의 원형을 뚜렷한 형태로 아이들에게 보여 준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지요. 일상이란 것은 왕왕 여러 가지 때나 얽매임으로 사물의 이미지를 탁하게 만들게 마련이니까. 그리고 15세 쯤이면 마침 반항기에 이르고 있어서, 부모의 존재에 대해 반발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니까 그리 쉽게 받아들여 주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이계와의 접점 같은 것이 중요하게 되리라고 저는 생각해요. 돌연히 의미 불명한 것이 나타난다든가... 이를테면, 브라질에서 "토라 상"(역주: 일본 영화 <男はつらいよ[남자는 괴로워]>에 나오는 주인공 아저씨) 같은 삼촌이 돌연히 찾아와 주변을 마구 휘둘러 댔다가 또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든가(웃음), 그런 것 말이에요. 그러나 그런 일은 실제로는 흔히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독서라는 것이 중요한 거지요. 책을 읽고 있으면 제법 많은 이계와의 리얼한 접촉이 있거든요. 저의 경우도 그랬어요.
――나카타 씨라든가 호시노 군이라든가, 그러한 타입의 사람은 지금까지 하루키 씨 인생에는 나타났었나요?
특히는 없었군요. 하지만 일반론을 말하면, 인간 안에서는 "본래 그래야 했던 것"같은 제2의 자신이 숨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것도 원형의 일종이라고 말해도 좋을 건데, 가만히 진지하게 상대를 보고 있으면 그런 이미지가 조금씩조금씩 떠올라요. 그것도 제가 <언더 그라운드>의 취재를 통해서 배운 것이었어요. 상대방의 인격 안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제2의 인격과 같은 것을 찾아낸다는 것.
저는 <언더 그라운드>의 취재를 할 때 몇 가지 룰을 정했는데, "인터뷰하는 상대를 무조건 좋아한다"는 것도 그 룰 중 하나였어요. 일단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진짜로 좋아하게 되는 법이에요. 물론 오래 사귀려면 아마 그렇게 쉽게는 안 될 거에요. 하지만 인터뷰하는 동안의 2시간 내시 3시간 쯤이면 어떤 사람이라도 좋아할 수 있어요. 우선 이쪽이 상대를 좋아하지 않으면 상대도 정직하게 말을 해 주지 않거든요. 그런 거에요. 그리고 좋아한다는 것은 상대 속에 있는 "좋은 원형"을 찾아내는 것이에요.
제가 나카타 상이나 호시노 군을 소설적으로 조금이나마 리얼하게 쓸 수 있었다면, 그것은 제가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을 진지하게 봐 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한 것은 요컨대 나카타 상적인 것에 대해 살을 붙여 주고, 호시노 군적인 것에 대해 살을 붙여준 것 뿐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만들어냈다고 하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어딘가에서 찾아내서 갖고 왔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에요. 물론 소설적으로 찾아낸다는 것은 즉 만들어낸다 그 말이지만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해변의 카프카>
――이 소설에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따로따로 시작되고, 각각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면서 종반이 가까워짐에 따라 끔찍한 전개가 되어가는데, 처음에 설계와 같은 것이 있었나요?
아니요, 그 따위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저 몇 가지 이야기를 동시적으로 쓰기 시작해서, 그것이 각각 제멋대로 진행되어 가는 것 뿐이에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몇 가지 이야기 어떻게 결부될 것인지, 그 따위 것은 저 자신도 전혀 알 수가 없어요. 이야기적으로 말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예측도 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단, 쓰기 시작할 때, "숲에 대해서는 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것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이미지에서 계속되는 것으로서요. 그러니까 숲 속의 세계가 나온다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던 것은 그 정도였지요. 나머지 일은 뭐, 되는 대로 되리라고.
원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속편 같은 것을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소설의 종반에서 숲에 들어가던 사람들의 그 후의 일이 저 자신도 궁금했으니까, 그런 것에 대해서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어요. 그러나 구체적으로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어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쓴 지도 15년 넘게 지났거든요. 그래서 전혀 다른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는데, 역시 숲의 이미지만은 그려 보고 싶었어요. 그런 마음은 제법 간절했던 것 같아요.
――홀수 장과 짝수 장은 번갈아 쓰셨나요? 아니면 홀수 장은 홀수 장만 어느 정도 계속해서 쓰고... 라는 그런 식으로 쓰셨나요.
홀수와 짝수는 어김없이 번갈아 썼어요. 그러니까 독자가 그 소설을 읽을 때와 똑같은 차례로 저도 그것을 쓴 거에요. 그러지 않으면 소설의 자연스러운 리듬이 생기지 않거든요. 물론 나중에 고쳐 쓰고, 보태어 쓰고, 갈아 넣고, 사실관계를 맞추기는 해요. 그것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작품이 안 되니까. 예를들면, 두 개 있는 "까마귀라고 불리는 소년"의 독립된 장은 나중에 보태어 쓴 거에요. 처음의 원고에는 없었어요.
출처 : http://kafkaontheshore.tripod.com/top.html
출처 : http://hvstmoon.x-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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